알맹이는 가라

Nov 25, 2017 | Design Message

채승진 Chae, Sungzin

채승진 Chae, Sungzin

디자인예술학부 산업디자인학 전공교수

Begone, the Substance

What are our memories composed of today? Most are visual images. We even have a saying: “Seeing is believing.” Moreover, people always wanted to keep what they saw as long as possible. What people have been doing for thousands of years to keep an object in an eternal image is to take a visual screenshot of what they saw in their minds and then recording them as wall paintings, sculptures, or art paintings. How has that changed nowadays? Whether it be something one saw in the past or a still object before one’s very eyes, the image spotted by lenses called ‘the eyes’ is transmitted into digital signals, stored, and screened. An image saved in the hard drive that we call ‘brain’ is sent back and forth to the screens in our minds; a digital massage. Through this ‘massage’, the images in our memories are blurred and reorganized at our own discretion, as if we are photoshopping our Instagram pictures, ending up to be a “Masterpiece Know-It-All.” Being a real existing witness, human eyes and brain perceive a single image in differentiated impression and notion depending on the person and it is reproduced in diverse ways according to perceiver’s points of view.


전지구적 요란함

오늘날 우리의 기억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대부분이 시각적 이미지다. 입에 달고 다니는 소리가 오죽하면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일까. 여기에 더해, 인간은 본 것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 했다. 사물을 영원의 이미지로 고정시키기 위해 수천 년 동안 사람이 한 일은 눈으로 본 것을 머릿속에 담았다가 다시 꺼내어 벽화로 옮기거나 조각이나 회화 작품으로 남기는 일이었다. 오늘날은 어떤가? 예전에 본 것이든 당장 앞에 놓인 정물이든 눈이란 렌즈를 통해 들어온 이미지는 전자적 신호로 바뀌어 저장되고 전송되고 상영된다. 뇌라는 하드 드라이브에 저장된 이미지를 마음의 스크린 속에 불렀다 돌려보내는 디지털 마사지. 그래서 ‘뽀샵질’을 하듯 우리 기억 속의 이미지도 자기 편한 대로 변형되고 조합되어 ‘나 잘난 작품’이 된다. 실제 목격자로서 사람의 눈과 두뇌는 같은 이미지를 보더라도 사람마다 다른 인상과 관념, 그리고 보는 방식에 버무려져 다른 방식으로 기억되고 재현된다. 움직임에 눈을 못 떼는 것은 동물적 본능이다. 피식자를 찾고 포식자를 경계하고. 동네방네 바보들이 다 모여 어슬렁거리며 지들끼리 찢고 까불고 떠드는 텔레비전 화면에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뭔가? 화면을 바꿔가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다. 맨날 나오는 흔한 군상들의 다 지난 이야기일망정 시시콜콜 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말 옮기는 것이 인류 공통의 속성이다.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에서 가장 갈망되던 가전제품, 바로 텔레비전이 거침없이 팔려나갔다. 시장에 첫 선을 보이자마자 1950년 한 해 동안 6백만 가구가 TV를 구입했다. 라디오 방송으로 틀이 잡힌 드라마, 뉴스, 어린이 프로그램은 TV로 방영되며 매출액을 올렸고 컬러 TV 방송이 시작되고 위성방송이 보편화되었다. 성인이 되기까지 어린이와 청소년은 평균 3년간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다(오늘날 또 다른 10년이 더해진다면 그건 스마트폰 들여다보는 시간일 것이다). 1951년 미국에서 동·서해안 전국 동시 방송을 한 이래 1969년 달 착륙 중계도 실시간으로 이루어졌다.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 이라크전, 911테러, 국정원 댓글, 세월호 참사, 촛불 혁명, ICBM 등등… 그 이미지는 대부분 TV 화면을 통한 장면으로 남아 있지 않던가. 텔레비전은 말 그대로 먼tele 것을 보여vision준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20세기의 동시성은 텔레비전에 의하여 비로소 가능해졌다. 동시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빛과 전파의 속도 덕분이다. 듣고자 보고자 하는 것을 빛으로 기록하고 전파에 실어 나르고 다시 빛으로 바꾸면 된다. 이 과정은 순간적이다. 동시성은 강박관념도 만든다. 라디오와 마찬가지로 TV와 스마트폰은 근본적으로 침묵을 싫어한다는 점이다. 할 말이 없으면 떠들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부수거나 박살을 내서라도 ‘죽은 시간’을 없애야 한다. 그래서 모든 화면 앞에서 우린 요란한 지구의 회전을 듣고 볼 수 있다.

침투하는 빛, 잔인한 아름다움

디지털 카메라의 기본 원리는 등장 인물에서 반사되어 나온 빛을 전기 신호로 바꾸는 것이다. 카메라 앞의 사물에 강한 빛을 쏘여야 카메라에 이미지도 잘 잡힌다. 이런 강한 빛의 홍수를 온전히 받아내어 거실의 60인치 하이데피니션 LCD/LED 스크린에 도자기 같은 피부를 과시할 수 있어야 한다. TV는 대통령을 만들기도 하는데 1~3분 제한된 시간동안 어떻게 하면 번지르르하고 그럴듯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보통은 매사 신중한 후보보다는 되는대로 질러대거나 말주변 좋은 TV형 사람에게 대체로 유리하다. TV 카메라는 전기적으로 찍히는 것이라 고감도 촬상관은 X-RAY와 비슷한 효과를 나타낸다. TV 토론으로 여론이 바뀔 수 있음은 익히 아는 일이다. 오늘날 대부분 나라의 대통령/총리/주석은 TV형 지도자다.

직접 현장을 목격한 우리는 사실성의 냉혹함에 놓인다. 잔혹한 범죄의 현장, 추락한 여객기의 잔해, 해일과 홍수에 떠다니는 사체와 부유물들, 불에 그슬리고 사지가 절단된 시체들… 이런 장면을 직접 대하기에는 정서적 부담이 너무 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장 접근이 어렵다. 그러나 카메라에 찍혀 재현된 이미지에서 사실성과 현장성의 속성은 바뀐다. 균질한 이미지로 정제된다. 카메라는 렌즈로 들어온 내용을 디지털 신호로 바꾸어 스크린에 매끄럽고 차갑게 재현한다. 실제 너무 잔혹하고 처절하여 직접 대하기 어려운 장면에 얼어붙은 생명을 넣는 것은 무엇인가? 증강현실. 사진과 TV는 실재를 보여주되 냄새도 촉감도 비명도 제거하고 멀찍이 떨어진 안전한 곳에 시청자 자리를 제공하는 한편 일단 안전한 위치에 계신 시청자에게는 그 현실을 좀 더 증강시켜 흥미진진하게 끔찍한 장면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엽기적이고 쇼킹한 장면을 찾아 헤매는 현대의 군상을 보라. 21세기의 TV와 카메라와 스마트폰은 인류가 가진 가장 비인간적 인간성을 새삼스레 발굴해줌으로써 인간다움은 철학 책에만 존재하는 ‘좋은’ 이야기임을 말한다.

매끄러움의 긍정성

21세기가 지나도 20세기 초에 상상한 미래상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미래 시민은 허연 우주복을 입고 다니지 않을 것이며 음식대신 알약을 먹지도 않을 것이고 하늘에 떠있는 공중캡슐이나 금속성이 감도는 지하 격납고에서 건조하게 서성이지 않을 것이다. NASA가 무수히 쏴 올리던 우주왕복선 사업이 언제부턴가 시들해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오히려 사람들은 갈수록 매력적이며, 장식적이고, 자극적이며, 다양하면서도 아름다운 세상을 갈구하고 있다. 매끈한 욕조, 화려하게 빛나는 수도꼭지, 깔끔한 휴대전화 액정화면, 반들거리는 책상 위 장식품, 이국적 요리를 제공하는 전문 식당, 분위기 좋은 커피숍들, 헤어살롱과 고전미가 가득한 그러나 먼지 한 점 없는 명품 가구점을 원한다. 친환경 목재로 마감한 실내디자인을 선호하고 밖으로 나서면 녹음 짙은 나무가 가득한 오솔길을 바라며 내 차는 날렵하고 맵시 있어야 한다. 사물의 시각적 측면은 너무 중요해서 경영학은 물론 디자인에 별 관심 없던 공학, 과학, 그리고 인문학까지도 호들갑이다. 한 때 미학적 마케팅이 분주하더니 기본이며 미적 원리의 과학적 규명을 주제로 머리 아픈 논문도 쏟아져 나온다. 학자는 물론 정치인, 사장님, 마케터까지… 참 분주하다. 엔지니어, 부동산개발업자, MBA출신, 심지어 국회의원들도 성공을 위해서는 진지하게 미학적 의사소통을 고려하고 미학적 즐거움을 얻는 동기와 소재에 대해 고심하고 있다.

자신만만한 마스크의 O전 서울시장이 한참 전 도중하차 하고, 올림머리와 백옥피부에 올인한 P전 대한민국 대통령은 유치장에 있다. 그들의 고객이었던 우리는 그것을 비난하면서도 사실은 원한다: 멋진 마스크와 하얀 피부! 윤리적이거나 합리적 사고를 넘어 시각적이고 촉각적 감성에 집착함이 인간의 타고난 미학적 본능이다. 다양한 매체와 매스컴 덕에 매끈한 미는 그 어느 때보다 훨씬 폭넓게 퍼지고 깊이 스며들었다. 어느새 미술관이나 무대장치나 부티크숍이나 일부 스타일 지향적 산업에만 국한될 수 없게 되었다. 무결점을 지향하는 감각적 매력들이 모든 이의 관심사와 목표가 되면서 매끈함의 미학은 거의 모든 공간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렇게 정제된 아름다움은 오늘을 대표하는 미학적 관점으로 고전적 예술철학의 해석을 거부한다.

개별 주체로서 사람들, 장소들, 사물들에 대한 반응을 언어나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외양과 느낌이라는 기재를 통해 의사소통하게 되었다. LTE, 삼 G, 사 G, 오 G로 진화하는 스마트폰은 빠르고 손쉬운 감각적 감상을 처리 속도 기술로 구현한다. 세간의 인기몰이를 하는 스펙터클한 특수 효과와 눈부시게 아름다운 영화배우들의 본질은 무엇인가? 무한 복제될 수 있는 매끈한 겉모습이다. 그럼 방송과 TV가 주목하지 않는 우리는 뭘 하고 있는가? 우린 무수히 셀카를 찍는다. 내면의 공허를 덮기 위해 셀카의 주체는 자신을 생산하려고 헛되이 애쓴다. 셀카는 공허한 형태의 자아가 공회전하는 공간이다. 셀카는 공허를 재생산한다. 나르시시즘적인 자기애나 허영심이 아니라 내면의 공허가 셀카 중독을 낳는다. 여기에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안정된 나르시시즘적 자아가 없다. 오히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부정적 나르시시즘이다. (한병철, <아름다움의 구원> 중「매끄러운 몸」, 26쪽) 껍데기가 중요한 시대. 이미지가 전부인 시대. 알맹이는 가라! 초고속 데이터전송 기술, 디지털TV, 랩탑 스크린, 그리고 스마트폰이 만든 사회는 매끄러운 표면만이 공회전하는 사회다. 메트릭스 세계.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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