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yond Design? Invisible Design?
‘Design’, a deformed language that has emerged in the modern Korean society, has no boundaries since it has no target and meaning, and it is obvious that therefore we cannot define what is beyond. Thus, in order to speak about what is beyond design, ‘design’ should first be able to stand as a clear, understandable language. The expertise of ‘Design’ should be excavated and it should be able to scientifically research and practice ‘design’. During the process, the so called ‘generalists’, specialists who have been changing their titles every moment, will be revealed that they are no ‘design’ specialists anymore.
디자인 그 너머에? 보이지 않는 디자인
YSID Journal 2017을 위해 ‘디자인 그 너머에’, ‘보이지 않는 디자인’에 관한 글 요청을 받으며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졸업을 앞둔 학생들이 디자인을 무엇이라 이해하기에, 그 너머에까지 관심을 갖는 것일까? 그들은 과연 ‘디자인’이란 단어에 대해 서로 간에 공유되는 명확한 개념이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 더욱 놀라운 것은, 영미권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스위스 사회학자 루시우스 부르크하르트Lucius Burckhardt의「보이지 않는 디자인 Design ist unsichtbar」(1980)을 어떻게 아는 것일까? 아니면 ‘감성디자인’, ‘유니버설디자인’, ‘지속가능디자인’, ‘공공디자인’, ‘서비스디자인’ 등과 같이 세간의 이목을 끌며 나타났다가 실체가 드러날 것 같으면 사라져버리는, 그런 유행어로써 최신 트렌드인양 나타나 학생들을 현혹시키고 그 소용돌이로 빨아들이기 시작한 것일까?
구글링Googling을 해보니「디자인 너머」,「보이지 않는 디자인」제목의 책이 각 한 권씩 출간되어 있지만,「네이티브 디자인Native Design」(김영기, 2000)처럼 무의미한 단어의 조합이라 논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디자인아트페어 2017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기획전시「디자인 너머 소재, 사물의 소리」에서처럼, 몇몇 곳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니 학생들이 또다시 이런 유행에 정신 놓고 쏠려갈까 걱정이 앞선다.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놋쇠의 성」이야기에서처럼 모두 다 유행에 눈이 멀어, 한결같이 죽음을 향해 몰려갈 것만 같아 두렵다. 그렇지 않더라도 디자인의 전문성을 쌓지 못하고 주변의 유행에 휩쓸려, 결국에는 ‘프리터족’이나 ‘알바족’으로 전락해가는 모습들이 늘어나고 있어 노심초사인데 말이다.
외래어 디자인
영어 디자인design의 어원은 라틴어 데시그나레designare로, 르네상스 시기를 거치면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 말은 그리스어 테크네techne (technique의 어원)에 기원을 둔 라틴어 아르스 ars(art의 어원)에서 정신적 활동을 육체적 노동 활동과 구별지어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 후로 아르스의 정신적 활동을 칭하는 데시그나레는 이탈리아어 디세뇨disegno, 프랑스어 데생dessin, 영어 디자인design, 독일어 게슈탈퉁gestaltung 등으로 퍼져나갔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의미 또한 변모해왔다. 그리고 19세기 중-후반부터 한자 문화권에서는 영어 디자인을 의장意匠, 도안圖案, 설계設計 등으로 번역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20세기를 거치면서 설계라는 말을 주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사용되는 ‘디자인’에 대해서 이러한 설명은 무의미하고, 마이동풍馬耳東風과 같은 것일 뿐이다. 1993년을 기점으로 ‘디자인’이란 말이 한국 사회에 혜성과 같이 나타나 삽시간에 일상으로 번져나갔다. 누구나 ‘디자인’을 말하며 ‘디자인’이 중요하다 주장하기 시작했다. 서로 앞다투어 ‘디자인’ 전문가라고 나서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저마나 자신이 ‘디자인’의 중요성을 ‘굴뚝 없는 공장’이나 ‘황금알을 낳는 거위’ 라고 특정한 장본인이라고 자랑스럽게 내세웠다. 한국디자인진흥원으로 개명한 곳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디자인’의 본질이자 목표는 ‘0.6초의 디자인’이라고 주장했다. 시장에서 소비자를 0.6초 내에, 순식간에 현혹시켜 소비를 실현해내는 것이 ‘디자인’이라는 말이다. 심지어 2009년 서울시의 ‘디자인올림픽’에서 ‘우리 모두 디자이너’ 라고 천명하면서부터 돈벌이에 연관된 활동 모두를 ‘디자인’이라고 주장하기까지 되었고, 한국의 디자인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서로 앞다퉈 모든 것이 ‘디자인’이고 모두가 ‘디자이너’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대중매체에서 활동하는 몇몇 철학교수들은 ‘인생 디자인’이란 말까지 만들어냈다. 이처럼 한국사회에서는 이제 모든 것이 ‘디자인’이고 모두가 ‘디자이너’인데, 그 너머에 또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 더욱이 그런 ‘디자인’의 전문분야가 따로 있을 수 있을까? 그런 ‘디자이너’의 전문성이란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언어 기능을 상실한 비언어 디자인
한국사회에서 ‘디자인’은 외래어로 도입되었지만 사회에서 의미 소통이 단절된, 즉 언어적 기능을 상실한 비언어非言語가 되었다. 프랑스어 마담madame이 한국어에서 아주 다른 의미로 바뀌었지만, 사회에서 나름의 특정 의미를 갖고 소통되기에 외래어라 할 수 있겠다. 그에 반해 ‘디자인’의 경우, 사람마다 제각기 각양각색의 뜻으로 말하고 이해하니 의미 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목소리 크고 힘있는 자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외치고 우기는 것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는 형국이 계속되고 있다. 그에 반해, 19세기부터 번역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던 설계設計는 지금도 영어 디자인이나 그에 해당하는 다른 언어들로 문제 없이 상호 직역되고 누구에게나 소통될 수 있을 정도로, 그 뜻이 분명한 한국어의 한 단어로서 자리잡고 있다. 비록 우리에게는 엔지니어링 분야에 관련된 용어라는 선입관이 짙게 깔려있지만 말이다.
한국사회에서 비언어非言語 ‘디자인’의 기원을 찾아가다 보면, 1950-1960년대 미술 분야의 변방에서 주류 미술을 동경했던 미술대학의 ‘도안과’, ‘장식미술과’, ‘공예과’ 등과 미군 PX 카탈로그의 의류를 본으로 맞춤옷을 만들던 명동의 양장점 ‘디자이너’ 등을 맞닥뜨리게 된다. 특히, 미술대학에서는 10년이 멀다 하고 ‘생활미술과’, ‘응용미술과’, ‘산업미술과’로 이름을 바꾸고, 1990년대에는 각가지 ‘디자인과’로 개명하는 등 시대의 흐름에 부응해온 것을 접하게 된다. 최근에는 ‘디지털디자인과’, ‘콘텐츠디자인과’, ‘서비스디자인과’, ‘융합디자인과’ 등등 정체불명의 전공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등장하고, 저마다 자신을 시시각각 새로운 이름으로 나타나는 ‘디자인’의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도드라진다. 그처럼 각 시기마다 이름을 바꿔가며 이전의 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것이라는 주장들이 펼쳐졌지만, 그 근간에 변하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 ‘디자인’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다수가 자신들의 전문성을 예나제나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로 설명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제너럴리스트’의 전문성, ‘제너럴리스트’의 전문분야란 과연 무엇일 수 있단 말인가?
한국적 디자인
그 ‘제너럴리스트’들이 말하는 각종 ‘디자인’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언제나 박정희 시대의 ‘한국적 민주주의’가 떠오른다. ‘한국적 민주주의’는 신식민지적 군사독재체제를 미화한 말이란 것이 명확하다. 그에 반해, ‘제너럴리스트’들의 ‘디자인’, 특히나 그들이 주장하는 ‘한국(적) 디자인’이나 ‘네이티브 디자인’은 무엇을 지칭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1995-1996년 일본디자인학회를 모범으로 한국디자인학회가 재발족할 때, 한국에서의 ‘디자인’을 정의하고 그 활동을 규명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 후로는 ‘디자인’을 정의하고자 하는 논의나 시도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각종 디자인학회가 연이어 발족하고 수많은 회원을 모집하며 호황을 누리고 있다. 어떻게 정의되지도 않고 언어적 소통기능도 갖지 못하는 말 ‘디자인’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적 연구가, 과학적 연구가 가능하단 말인가?
현대 한국사회에 출현한 기형 언어 ‘디자인’은 지칭하는 대상이나 의미를 특정할 수 없기에 그 경계를 구별할 수 없고, 그 너머 또한 규정할 수 없음이 자명하다. 따라서 ‘디자인 그 너머’를 말하려면, 우선 ‘디자인’을 규명하고 소통 기능을 갖는 언어가 되도록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또한 ‘디자인’의 전문성을 밝히고 ‘디자인’의 과학적 연구와 실천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는 필연 시시각각 이름을 갈아온 기존의 ‘디자인’ 전문가들, ‘제너럴리스트’들이 더 이상 ‘디자인’ 전문가가 아님이 드러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울름조형대학Hochschule fuer Gestaltung Ulm에서 인본적 사회통합을 향해 추구한 환경조형 Umweltgestaltung(68문화혁명운동과 맥을 같이 하는 조형미술운동), 그 연장선 상에서 부르크하르트가 「보이지 않는 디자인」을 통해 비판적으로 주장한 디자인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디자인’에서 ‘소비자’라는 소비 실현을 위한 개념을 떨쳐내고, 사용자의 이익을 보호하고 대변하는 것과 함께 사회적으로 건강한 사용의 문화를 이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는 바로 기존의 자본 이익 추구에 봉사하는, 마케팅 도구적 ‘디자인’과 결별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디자인’이 자기 의식과 판단을 상실한 피고용 노동활동이란 기존 관념을 떨쳐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본시장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 강조되어온 ‘창조’, ‘창의’의 강박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