亂世
2013년에 접어들면서, 그간 안절부절 노심초사하며 걱정하던 난세(亂世)의 징조들이 하나 둘씩 그 본 모습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가장 심각한 것들 중 하나가 독선적으로 진행된 국민교육, 대중교육의 성공적 완성이다. 자본의 이윤만을 경주하며 출세 경쟁에 전념하는 한국사회에서는 그 간에 서구 계몽주의자들의 교육이념과 방법을 무비판적으로 신봉하고 내세우며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국민교육과 대중교육을 펼쳐왔다. 거기서 국민들은 오로지 동일한 것을 놓고 동일한 조건에서 생존을 건 경쟁에 몰입하도록 교육되었다. 그들은 이제 영화 ‘메트로폴리스(1927)’에서 보여준 공장으로 향하는 지하 노동자들의 행진을 연상케 하는 모습으로, 같은 곳을 향해 일사불란하게 줄 맞춰 가며 서로가 앞줄에 서고자 서로를 팔꿈치로 밀어 붙이고 있다. 그들은 줄에서 벗어나면 낙오자(루저 loser)가 된다는 공포감에 휩싸여 죽기살기로 줄에 매달리고, 모두가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가능한 앞줄에 서려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그러한 삶은 결국 ‘지옥’과 같은 삶일 수 밖에 없고, 앞줄에서면 설수록 ‘지옥’과 같은 삶에 먼저 도달하게 되는데도 말이다.
한국의 교육은 이제 지배권력을 위해 국민들이 사리판단력을 잃고, 경쟁 강박으로 심신이 피폐해져 서로를 팔꿈치로 밀며 생존투쟁만을 벌이도록 하는 과업을 완수해냈다. 그렇게 교육받은 이들 중, 우수한(?) 인재들은 선봉에 서서 모든 매체를 장악하고 지배권력의 안위를 위해 국민 대중을 교육하고 있다. 거기서 1930년대 라디오가 파시즘을 신봉하는 국민을 교육해내는데 중추적 역할을 한 것보다, 그리고 1950년대부터 TV가 소비대중을 교육하고 이끌어온 것보다, 오늘날 한국의 인터넷은 몇 갑절 더 강력한 교육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초·중·고등학교에 인터넷 기반의 전자교과서 도입 계획이 추진된다는 말이 왕왕 들려온다.
학생들은 이미 인터넷이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에서 컴퓨터 부품처럼 ‘정보’의 파편들에 대응하는 정해진 패턴에 맞춰 반응하도록 교육되었다. 그 속에서, 자신이 뭘 공부하고 싶고 어떤 전문가가 되고 싶은지를 느끼고 생각하기 전에, 서열화된 대학 중에서 가능한 앞 줄의 대학에 가기 위해 경쟁해야만 한다는 강박과 집착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해가 갈수록 더욱 치열해지는 대학 서열경쟁에 내몰릴 뿐이다. 대학들은 각종 매체를 통해 “명품교육”과 “취업”을 내세우며 광고를 하고 (소비) “고객” 유치에 열을 올린다. 그 과정에서 대학 본연의 전문성과 전공교육은 상실되었다. 이제 “고객”들은 보다 앞 줄의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조금이라도 유리할 것 같은 졸업장과 자격증을 구매하려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그렇게 해서 직장에 들어간 “고객”들에게는 ‘잘리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게 되고, 가능한 보다 ‘높은 연봉’의 직장에서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어 물질적으로 풍족해지는 것이 최고의 목표가 되었다. 그들은 돈만 잘 받을 수 있으면 자신이 기계부품 취급을 받더라도 그것을 감수하며 열심히 일한다.
이미 한국인들은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마음을 잃어버린지 오래다. 삶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돈이 이제 삶의 목적이 되어, 돈벌이를 잘하는데 목숨을 바쳐가며 매달리고 정진한다. 급기야 “부자 되세요”라는 말의 광고가 나오고, 그 말이 유행하고 교회와 절에서의 축도가 되고, 그 말을 제목으로하는 각종 책들이 나오는 세상이 되었다. 허나 모두가 부자가 되는 그런 세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에게는 부자가 되는게 삶의 목표가 되었다. 모두가 부자가 되고자 하는,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향한 생존을 건 강박은 한국인들을 낙오에 대한 공포의 도가니에 빠져들게 하고, 결국 그 공포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강한 지배권력과 영웅에 열광하도록 만들었다. 마치, 이탈리아인들이 무솔리니(B. A. A. Mussolini)에 열광하고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독일어 권 사람들이 히틀러(A. Hitler)를 보고 열광하며 눈물을 흘렸던 것처럼 말이다. 이제 한국 국민들은 자신들을 지배할 강한 국가권력에 열광할 뿐 아니라, 삼성으로 대표되는 대기업이 없는 한국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는 몇 년 전에 죽은 미국의 억만장자 스티브 잡스(Steve Jobs)까지도 한국 국민들의 영웅이 되어 회자되고 있다.
선한 디자이너와 악한 디자이너
오늘날 나타나는 난세의 모습은 한국의 디자인, 디자이너와도 결코 무관할 수 없다. 온갖 현란한 양식들이 유행하고 추종되어 극도의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내게는 무엇보다도 그 간에 디자인의 혼란스런 문제들을 같이 고민하며 바른 길을 찾아가고자 하는 동료로 여겼던 몇몇 이들이 작년의 대규모 전시에 공개한 것들을 접하고서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올해에는 그보다 더 한 것을 만들어 공공연하게 설치해놨다. 또한 디자인비판 담론에 남다른 열정을 갖고 노력했던 이가 바라던 직장에 들어가고 나자, 이제는 그가 추악한 경쟁의 선봉에서 활약(?)한다는 소식만이 전해 들린다. 결국, 모두가 앞서 말한 난세 속의 한국 국민 그 자체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단 말인가?
한국에서 디자인이란 애초부터 “굴뚝 없는 공장”이나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내세웠듯이, 기업의 이윤을 높이고 돈을 잘 벌게 하는 도구로 여겼다. 그리고 “0.6초의 디자인”이 말해주듯이, 소비자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현혹시켜 소비를 실현해 내는 것이 디자인의 목표였다. 그래서 디자인은 이제 모든 한국 국민의 염원에 부응하여, 돈 벌고 부자 되게 해주는 부적과도 같은 의미로 자리잡고, 모든 말에 접미사로 붙여져 사용되고 있다. 2009년 서울시의 “디자인올림픽”에서 “우리 모두 디자이너”라고 천명하면서부터 돈벌이에 연관된 활동은 이제 모두 “디자인”이 되어가고 있다. 모든 것이 “디자인”이라 함은 디자인이라는 전문분야와 그 전문활동이 없다는 말과 동의어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디자인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서로 앞다퉈 모든 것이 “디자인”이고 모두가 “디자이너”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그들 사이에서는 “융합”이 부각되는 오늘날의 시대 조류에 맞춰 엔지니어링 디자인(engineering design, 工學設計)을 새로이(?) 추구해야 할 “융합형” 디자인으로서 역점을 두어야 한다는 주장들이 오가고 있고, 그래서 앞으로는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엔지니어링 디자인을 관심 갖고 해나가야 한다는 말까지 들려온다. 돈 벌고 부자 되게 해준다는 “디자인”이란 말의 마법(?)의 힘이 지속되려면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아야만 하기에, 한 해가 멀다 하고 새로운 “디자인”이 새 옷을 갈아입고 나타나, 기존의 디자인을 대표하는 “첨단”으로서 유행을 선도해나간다. 그리고 최근 디자인에 관한 설명에서 페르소나(persona)란 말이 크게 유행하는 현상처럼, 새로운 “디자인”을 말할 때 그 실체는 알 수 없지만, 마치 무엇인가가 있을 법한 분위기와 환상을 자아내기 위해, 광고 마케팅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외래어를 차용해서 사용한다. 처음에는 영어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요즘에는 힐데스하임(Hildesheim)과 카페베네(caffebene) 등과 같이 불어와 독일어에서부터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까지 확장되고 있다. 여기서 한국 국민들이 대열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그 말 뜻도 모르며 따라 하기에 열중하는 것처럼, 디자인 분야에서 벌어지는 현상들 역시 그러하다. 자칭 디자인 전문가와 디자이너가 되고자 하는 이들은 시시각각 새로이 옷을 갈아입고 유행을 선도하는 “디자인”의 대세를 따라가고 뒤쳐지지 않고자 필사의 노력을 부단히 경주한다. 그런 와중에, 그 “디자인”의 실체를 알려 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당연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 않겠는가?
세상의 반은 신이 창조하고 그 나머지 반은 디자이너가 만든다는 이탈리아 건축가 지오 퐁티(Gio Ponti)의 말처럼, 서구에서는 오래 전부터 디자이너의 사회적 역할에 주목해 왔다. 특히, 선한 (건축) 디자이너는 천당을 만들고 악한 (건축) 디자이너는 지옥을 만든다는 18세기 풍자화는 디자이너의 사회적 역할과 의미를 특징적으로 잘 그려냈다. 그것에 따르자면, 한국의 디자인이 결국 지금의 난세를 만드는데 매우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디자이너가 비판의식을 갖고 올바른 사리판단을 통해 디자인 활동을 행한다면, 그것으로 난세를 극복해낼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사회적 산물이기에, 그가 속한 사회의 세계관과 시대정신에 지배를 받지만, 인간의 비판의식은 그 사회적 한계를 일정부분 극복할 수 있게 만든다. 그리고 디자이너의 비판의식을 통한 디자인 활동의 결과물들은 사회의 물질적 토대를 이루고 사회적 관계와 문화에 매우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다시금 사회의 세계관과 시대정신에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그래서 난세를 극복할 비판의식 함양이 중요한데,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를 헤쳐나간 제자백가(諸子百家) 현자(賢者)들의 가르침만큼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특히, 디자이너에게는 공작인(工作人)의 입장을 대변하는 묵가(墨家)의 – 애(愛)와 이(利)에 관한 상호 쌍무(雙務) 원칙에 입각한 – 겸애(兼愛)의 도(道)가 무엇보다 큰 도움이 될 것이나, 거기서 노자가 말한 도법자연(道法自然)의 가르침 또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2013년 겨울이 찾아오는 날
대안리 금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