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에 빠진 공을 가장 확실하게 꺼낼 수 있는 방법은 뭘까? 답은 우물에 물을 가득 채워 넣는 것이다. 가장 확실하지만 쉬워보이진 않는다. 그렇다면, 우물에 빠진 게 공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면, 빠져 나가기 위해 하늘보고 물이 찰 때까지 기우제라도 지내야 하나. 내가 빠진 우물을 맨손으로 가득 채워 넘치도록 만드는 일. 물리법칙을 가볍게 무시하는 이 비유에서 한 가지 불행이자 다행인 것은, 세상살이가 단순히 우물 같지는 않다는 점이다.
유년기를 거쳐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직전까지 나의 장래희망은 한결같이 공학도였다. 수능이라는 작은 폭풍에 떠밀리고 나서 정신차려보니 말라버린 거대한 우물 같던 혹한의 학교에서 입학식을 치루고 있었다. 그리고 공학도 꿈나무가 처음으로 구입했던 전공 책의 제목은 예술가와 디자이너였다. 스스로를 굴러들어온 ‘돌’이라고 생각했었기에 나보다 일찍부터 착실히 준비해왔던 동료들에 대해 열등감의 연속이었고 그들이 갖지 못한 걸로 나의 영역을 굳건히 해야 했다. 내 대학생활의 대부분은 어떤 식으로든 내가 할 수 있는 걸 찾는 것이었다. 처음엔 오기로 시작했던 고민이 언젠가 부터는 졸업 전에 디자인사에 한 획을 그을 마스터 피스를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호기로 바뀌었는데, 덕분에 졸업 직전까지도 결과물들의 면면은 참담했다. 그래도 천직이라 생각해서 사명감까지 갖고 있던 제품디자인이었건만, 학교를 벗어 난지 2년, 건축설계사무소를 다니면서 컨퍼런스 기획자로 일하다 보니 내 정체성은 더더욱 모호해져있었고 원래부터가 굴러들어온 돌이었던 탓인지 다행히도 다른 곳으로 구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좀 덜했다. 이왕 구르기 시작한 거 좀 더 구르자는 생각 끝에 남은 한 가지 유일한 걱정거리는 남들에게 나를 소개하는 방법이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내겐 두 개의 화두가 생겼다. 하나는 우물을 파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우물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한 우물만 파라’는 것과 ‘우물안 개구리’라는 상투적인 두 격언에서 우물이라는 것은 하나는 긍정적이고 하나는 부정적으로 쓰이는 덕에 언뜻 보면 둘은 모순 관계에 놓여있는 것 처럼 보인다. 어디까지나 비유의 부작용인데. 그 행위 주체를 명확히 하면 답은 보다 명료해진다. 우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깊이 파고 들 되, 넓은 시야를 잃지 않는 것. 오히려 이 둘은 상호 보완적이다.
우물을 판다는 것은 단순히 한 가지를 꾸준히 열심히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내가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내 안에서, 내가 속한 문화의 맥락에서 치열한 고민을 통해 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대학생활 중 가장 스스로 만족했던 결과물은 수백 장의 스케치에서가 아니라 한참을 책을 읽으며 고민하던 중에 만들어졌다. 나만의 것을 찾기 위해서는 내면으로 깊이 침잠해야 한다는, 확신처럼 굳어진 첫 번째 화두에 대해서는, 내 짧은 경험만으로 증명 할 수 없으니 사례를 빌려와야겠다. 처음 이런 종류의 사명감을 갖게될 때쯤 가장 좋아하던 디자이너가 한 명 있었다. 이미 세계적으로 입지를 굳힌 일본의 패션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일화를 좋아하는데, 패션 디자인 공부를 하기 위해 파리, 뉴욕 등지로 유학길을 떠나, 지방시, 기라로쉬 등의 유수의 브랜드에서 일하고 돌아와 그는 이런 이야길 했다. ‘서양 복식은 완벽했습니다. 아무리 시도해도 거기에는 내가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는 곧 동양인인 자신이 서양의 방식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깨달음이었고, 이후에 그는 고국으로 돌아와 그 만의 방식으로 지금의 이세이 미야케 디자인을 선보이게 된다. 표면적으로 디자인은 한 명의 탁월한 개인이 천부적인 감과 통찰력으로 빚어내는 듯 보이지만, 그 탁월한 개인과 디자인은 역사와 문화라는 맥락에서 탄생하고 성장한다. 이 외에도 일본의 건축, 그래픽, 제품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자신의 방식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는 두 손에 다 꼽지 못한다. 이에 비해 아직까지 제다움을 찾지 못하고 있는 한국은 개인적인 관점에서 그 만큼 기회가 많다는 뜻이며, 평생의 화두로 확신을 갖고 정진해야하는 이유이다.
블루오션은 곧 레드오션이 되고 레드오션끼리의 교차점에 또 다른 블루오션이 생겨나는 일은 어제 오늘의 사건이 아니다. 넘쳐흐른 물은 어디로든 흐를 수 있다. 학문 역시 마찬가지라 그 영역과 깊이를 더하다 보면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접점을 찾게 되기 마련이다. 세상은 언제나 맞닿은 우물의 연속이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단지 그 깊이가 깊어졌을 따름이다. 내 두 번째 화두는 반쯤은 흥미와 동경에 의해서, 반쯤은 필요에 의해서 구체화 되었다. 스티브 잡스가 서류봉투에서 맥북 에어를 꺼내던 날, 세상은 그의 환상적인 프레젠테이션 아이디어와 언변, 제스처를 거듭 연구했다. 심지어 프레젠테이션 전문가가 등장하는가 하면 엄청난 양의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모든 건 서류봉투에 들어가는 맥북이 없었다면 애초에 성립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음에도 사람들은 너무 쉽게 이를 간과해버린다. 이를 모르지 않았음에도 학창시절 마지막 1년은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고 내 부족한 점을 보완해 줄 것이라 보이는 모든 것들을 좇았다. 그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았지만 한창 막막해지던 시기에 차라리 청량했던 새로운 고민을 얻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았다고 생각했을 때 쯤 마주했던 전공 바깥의 모든 것들은 흥미와 가능성 그 자체였다. 지금까지는 단순히 영감의 원천, 참조, 도구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들의 위상이 역전되어 신입생 때 주어졌던 예술가와 디자이너라는 명제를 다시 곱씹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배경에 대해서는 1945년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예술, 디자인, UX, 미디어 아트에 이르기 까지 수많은 사례들과 연구 자료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경계의 희석은 이미 충분히 일반화가 가능해졌고, 대부분의 디자인 스튜디오들이나 그토록 보수적이라는 건축분야도 이제는 할 수 있는 건 다 하는 추세다. 이게 서로의 밥그릇 뺏기인지 새로운 기회인지 생각해보기 이전에, TEDx 컨퍼런스 기획자로 일하면서 조금은 특이한 배경의 건축사무소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이 모호함 들을 정리하게 해주는데 유용한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모두가 동의하진 않겠지만, 온전히 제품 디자이너라고 불리는 시대는 이미 지나가고 있다. 새로운 미디어, 기술과 결합한 모든 것들과 친해야 하고 이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분야를 만들어낸다. 자신의 분야에 대한 깊이와 차별성을 확고히 다지는 것, 그러면서도 자신의 분야에 갇히지 않는 것. 2년 전이었다면 이와 같은 내용에 대한 바람직한 상은 T형 인간이라 정리 했겠지만, 지금에 와서는 이마저도 녹록치 않다. 앞서서 세상은 맞닿은 우물이라 이야기했으나 발전에 따라 경계를 허무는 촉매들이 무척이나 다양해졌기 때문에 벽이 존재한다는 것을 상정한다는 것 자체가 구시대적 발상이 됐을 정도로 서로에 대한 진입 장벽이 매우 낮아지고 있다. 이는 분명히 새로운 기회이지만 동시에 위협이기도 하다.
학교를 나와서 했던 모든 활동 중 어떤 것도 산업 디자인이라 부르기 어려운 것들이었어도 여전히 스스로를 예술가도 건축가도 아닌 산업 디자이너라 소개하고 싶어 하는 나를 발견했다. 이 구분짓기에 대한 모든 혼란은 그 판단의 기준을 하는 일과 스킬, 그에 따라 갈라놓은 분야에 따르는 것에 익숙해진데서 비롯된다. 디자이너라 하면 포토샵 기술자가 아니라 나름의 프레임으로 자신을 설명 할 수 있어야 마땅하다. 내가 어느 분야에서 어떤 일을 하든, 나는 여전히 모든 현상을 산업 디자이너의 프레임에서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이런 뚜렷한 태도의 확립은 예술을 해도 예술가가 아니고, 건축을 해도 건축가가 아닌 이유가 된다. 컴퓨터를 탑재했다고 해서 스마트폰을 컴퓨터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스마트폰이든 아날로그 식 전화기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준다는 본질이 변하지 않았기에 그렇다. 이 본질을 망각한 제품들은 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자신의 분야에 대한 전문성, 그 이전에 문화-역사적 DNA를 바탕으로 견고히 확립된 본질에 기대어 그에 따른 태도를 취한다는 것. 그 방점으로부터 나는 내가 될 수 있고 확장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는 어쩔 수 없이 퍼스펙티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