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디자인명품, 희망서울

『세계디자인명품, 희망서울』은 연세대학교 대학원 산업디자인학과에서 2012년도 1학기에 진행한 『한국디자인사회사』 수업의 첫 산물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디자인”과 “문화”만큼이나 유행어처럼 빈번히 이야기되면서도, 그 의미가 특정치 않고 모호하게 사용되며, 심지어 호도되기까지 하는데도 아무런 거리낌을 갖지 않는 것도 없을 것이다.
과거에 “디자인”은 대학에서의 전공자들과 명동의 양장점 관계자들 사이에서나 사용하던 말이었다. 그러나 1993년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신경영”을 선포하면서 “디자인”을 강조하고 당시 김영삼 정부에서도 “디자인”을 중요하게 내세우게 되면서부터 삽시간에 한국인이면 누구나 너도나도 앞다퉈 “디자인”이란 말을 유행처럼 사용하기 시작했다. 간판집과 도배집에서부터 대학의 학과명에 이르기까지 이름에 “디자인”을 넣는 명칭변경의 열풍이 불고, 심지어 “철학 디자인”, “인생 디자인”, “생활 디자인”이란 말까지 유행했다. 그로부터 “디자인”이란 말을 사용하는 용례의 스펙트럼은 더욱 더 확장되어왔다.

이러한 외래어 “디자인”의 도입과 그 의미의 변천과정은 20세기를 거치면서 벌어진 한국사회의 서구화와 그 맥을 같이한다. 특히, 1968년을 기점으로 시작된 “조국근대화” 과정에서부터 한국인들은 “산업역군”이 되어 “경제개발계획”의 고지를 향해 진군하여 전투임무 완수에 매진했다. 그 당시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된 『국민교육헌장』과 『국기에 대한 맹세』 및 교련 등을 동반한 “국민교육”은 “조국근대화”를 향한 “산업역군”의 사기를 날로 드높였다. 그러한 “국민교육”의 연장선에서, 이순신으로 대표되는 “호국영웅”들의 동상 건립운동이 서울을 비롯한 전국 도시로 퍼져나갔고 시멘트 콘크리트로 광화문과 남대문 동대문 및 불국사 등의 “전통문화재복원”사업이 단기간에 이루어졌으며, 동시에 국회의사당과 한국민속박물관 및 세종문화회관 등의 “전통양식”을 되살리는 대규모 국가 공공건축물 건설사업이 펼쳐졌다. 그리고 1981년의 “국풍” 운동을 필두로, 단기를 사용하는 배달민족의 “전통” 되살리기에 온 국민이 애정을 쏟아 부었고, 예술의전당과 독립기념관 등의 신축되는 국가 공공건축물에 부연 설명되는 “전통”의 상징을 통해 민족적 긍지를 키웠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온 국민의 단합된 애국심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이끌었고, “한강의 기적”을 전세계에 알렸다는 자화자찬과 함께 민족적 자긍심을 북돋았다.

한국사회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마침내 서구화된 현대소비사회로의 전환을 맞이했다. 그 간의 “조국근대화” 과정에서 불거졌던 심각한 사회적 문제들은 모두 소비사회가 가져온 물질적 풍요 뒤로 감춰졌다. 소비의 중심으로 급부상한 중산층 소시민들은 소비의 향락에 빠져들고 “디자인”이 가져다 줄감각적 “마사지”를 향유하는 달콤한 미래를 꿈꿨다. 그러나 그 꿈은 얼마 가지 못하고, 1997년의 경제위기로 무너져버렸다. 결국, 중산층의 붕괴와 함께 확연히 들어난 “약육강식”, “적자생존”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일상은 살아남기 위한 경쟁의 치열한 전쟁터가 되었다. 거기서 사람들의 뇌리에 박힌 심각한 생존의 위협은 르넝(E. Renan), 겔르너(E. Gellner), 홉스봄(E. J. Hobsbawm) 등이 밝힌 것처럼, 극단적인 민족적 애국심을 고취시켜 한국인들을 국가와 민족의 “전통”에 더욱 집착하게 만들었다. 또한 2002년 월드컵에서 온 국민이 한결같이 광적으로 열광하는 모습을 보여줬던 것처럼, 국가와 민족으로 대표되는 “우리”라는 집단에서 벗어나지 않고자 누구나 같은 것만을 향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 결과, “루저”라는 유행어가 잘 드러내주듯, 한국인들은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오직 하나만을 향해, 즉 자본경제적으로 순위가 매겨지는 서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존투쟁을 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한 변화와 함께, 1998년에는 공보부(1948)에서 시작된 문화공보부(1968년)가 문화부(1990)와 문화체육부(1993)를 거쳐 문화관광부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출범했고, 김대중 정부가 “신지식인”을 내세우며 추진한 “지식산업” 육성정책의 일환으로서 고부가가치 창출을 위한 “문화관광산업”의 육성이 대두되었다. 정부는 “신지식인” 제 1호로 심형래 영화감독을 선정하고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미국 헐리우드 영화의 경제적 성과를 “문화관광산업”이 향해야 할 성공모델로 내세웠다. 대학과 학계에서는 1990년대에 영미권에서 크게 유행한 “문화연구(Culture Studies)”들을 발빠르게 소개하면서, 고부가가치 창출을 위한 “문화컨텐츠산업” 육성정책을 이끌어냈다. 디자인 분야에서도 “굴뚝 없는 공장”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지식산업”의 핵심분야 중 하나임을 주장하는 한편, 다른 편으로는 “문화컨텐츠디자인”이라는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는 새로운 분야를 개발해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변화들의 지향점은 “한류”로 대표되는 바와 같은 관광오락 산업이었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만물의 상품화가 사회 전 영역에 걸쳐 급진적으로 전개되면서, 21세기의 한국사회는 “다이나믹 코리아”라는 브랜드네임을 내세우는 완연한 기업국가로 변모했고, 지방자치단체들 역시 저마다의 브랜드네임을 내세우며 기업국가 대한민국의 계열사로서 자리매김했다. 그 결과, 주택과 도시는 물론 교육과 기관, 심지어 사람까지 모든 것에 걸쳐 “명품”만을 내세우며 “명품”만을 지향하는 사회가 도래했다.
거기서 그 무엇보다, “다이나믹 코리아”를 대표하며 “세계디자인수도”로서 “디자인올림픽”을 개최하고 “명품” 수도로서 “디자인서울”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하이! 서울”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까지 인구 백만 명도 안되었던 수도 서울은 “조국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인구 천만 명의 거대 도시로 변모했고, 오늘날에는 한국인의 절반 이상이 서울을 중심으로 수도권에 모여 살아가는 이주민들의 도시가 되었다. 이러한 인구변화와 함께 도시는 급팽창했고1970년대 강남개발에서부터 1990년대 이후의 위성도시개발 등과 같은 대규모 개발사업들 또한 병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사대문 안의 옛 서울 지역 또한 개발의 물결과 함께 “전통문화재복원” 사업이 맞물리면서 급변해 왔다. 특히, 최근에 대대적으로 전개된 “명품” 수도 서울을 향한 “디자인서울”은 사대문 안의 서울 모습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이상과 같은 맥락의 이해를 바탕으로, 2012년 봄에 사대문 안의 중심지역들을 찾아다니면서 각 지역의 공간과 건축물 및 인공조형물들의 현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현재 개발된 서울 사대문 안의 모습과 그 개발의 방향은, 조선총독부와 화신백화점 및 세운상가 등의 철거 및 대대적인 재개발 사업들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과거의 부정과 단절”이라는 서구 현대성(Modernity)의 특성을 정통으로 따르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런 정통적인 모습은 서울시가 “도심재창조 프로젝트(2007)”에서 지정한, 경복궁과 광화문에서 시작되는 “역사문화축”과 북촌과 인사동에서 시작되는 “전통문화축” 지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그 지역들은 “역사와 전통”과 그것의 시장경제적 관광상품화를 위한 “과거의 부정과 단절”이 갖는 상호 대립모순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와 같이 “과거의 부정과 단절”의 특성을 보여준, 서울 사대문 안의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공간과 건축물 및 인공조형물들의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변천 모습들을 모아, 2012년도 『한국디자인사회사』 수업의 첫 결과물로서 정리해보았다. 이 과정에서 그 무엇보다 흥미로운 발견은 서울과 수도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과거의 부정과 단절”로 개발된 서울 사대문 안의 “역사와 전통”은 모순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즐겁고 값진 “역사와 전통”의 체험이 된다는 것이다. 특히, 이주민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 발견점들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요약정리하여 소식지(Journal) 형식으로 발행하고 전체 내용을 온라인 상에 공개하여, 『한국디자인사회사』 수업의 첫 결과물을 많은 이들과 함께 공유하고자 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와 같은 결과물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해나가, 연세대학교 대학원 산업디자인학과만의 특성으로 발전시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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