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cing back 2020: COVID-19 regret
Vast virus attack started from the beginning of 2020. The nature has been collapsed precipitously by the random development through taking it as the highest virtue by the blinded human to the capital revenue only. All five great oceans and six continents are suffering from the overwhelming trashes and the animals and plants on the South and North Pole are being disappeared while the climate changes rapidly. In spite of that, eventually the virus assault started vehemently as the human indulges in the development more eagerly without stopping the development. The manifested thing from this is that the biggest enemy against the nature is ‘human’ as if the atmosphere was obviously better on 2020. In addition, the virus attack revealed that the ‘mankind’ is being spiraled into the self-killing and firstly the symptom of perish inherent to the species of ‘Korean’ than any others.
2020년 초부터 대규모 바이러스 공격이 시작되었다. 자본 이익 만에 눈먼 인간들이 무분별하게 자행해온 개발로, ‘개발’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으며 자행해온 결과로 자연은 급속히 파괴되었다. 오대양 육대주는 넘쳐나는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기후가 급속히 바뀌면서 남극과 북극의 동식물들은 사라져가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들이 개발을 멈추기는 고사하고 더욱더 매진하자, 결국 바이러스들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로써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2020년의 지구 대기질이 확연히 좋아진 것처럼, 자연의 최대 적이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바이러스 공격을 통해 ‘인간’이 자멸의 상태로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 무엇보다 ‘한국인’이라는 종(種) 안에 내재한 멸망의 징조를 극명하게 드러내 줬다.
COVID-19 배양토, 대도시 그리고 서울공화국
COVID-19는 우한(武漢, Wǔhàn)에서 창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한은 인구 11,081,000명(2018년 기준)의 후베이성 성도로, 중국 중부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이다. 그리고 우한은 철도, 도로, 고속도로가 통과하는 중국 ‘아홉 개 주의 통로’이다. 최준영은 인류가 도시라는 공간을 만들어서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전염병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고,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대도시화·글로벌화된 현대문명에서 야생 바이러스의 뚜껑이 새롭게 열리고 있다고 한다.1 최근의 바이러스 대유행들은 이를 잘 입증해준다.
한국의 고도성장과 함께 경상도의 중심 대도시로 급속히 성장한, 인구 2,426,849명의 대구광역시에서 2020년 초 바이러스가 대유행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토의 11.8%에 불과한 서울-수도권에 국민의 절반 이상이 다닥다닥 몰려 사는 곳에서 COVID-19를 비롯한 신종 바이러스가 지속해서 창궐하는 것은 결코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한국인들은 그런 위험을 알더라도, 서울-수도권에서는 다른 곳보다 쉽게 바이러스의 먹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더라도, 그들은 서울-수도권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기는커녕 거기에서 밀려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더욱더 ‘인서울’을 향해 머리를 들이밀어 댄다. 이러한 현상은 결코 개인의 문제일 수가 없다. 이는 바로 대한민국을 장악한 서울공화국의 ‘인서울’ 헤게모니에 따른 사회구조적인 문제이다.
“COVID-19는 계급 계층을 가리지 않는다.” 뒤에 숨겨진 진실
COVID-19 대유행과 함께 1986년에 출간된 울리히 벡(Ulich Beck)의 『위험사회(Risikogesellschaft)』2가 돌연 주목받고, 유행처럼 수많은 곳에서 인용되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자연재해와 달리 현대산업사회가 생산하는, 스모그 등의 공기오염, 방사능오염, 기후급변 등의 재난 위험은 부자와 가난한 자, 고학력자와 저학력자 모두에게 동일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울리히 벡의 말처럼 COVID-19 위험 또한 “계급 계층을 가리지 않는다.”라고,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위험하다고들 한다. 그러나 1960~70년대 대중문화 운동을 경험한 울리히 벡이 주장하는 핵심은 현대사회의 위험은 모두 다 같이 대비해야만 줄일 수 있기에, 위험의 인식이 어려워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가난한 자나 저학력자들에게 대중교육을 통해 위험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대비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문화운동을 촉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나 저학력자, 즉 사회의 저층민은 위험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여 무방비로 노출되거나, 위험에 대처할 능력이 없기에 위험을 키우고 확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현상은 전염병 역사에서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너무도 잘 드러난다.
김병회는 19세기 중반 서구의 콜레라 대유행에서 런던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사례를 들어 하층계급이 주로 희생되었다고 설명하면서, 정원용의 『경산일록(經山日綠)』을 통해 당시의 조선도 그러했음을 밝혔다: “평일 잘 조섭한 자들은 많이들 온전할 수 있었다. 소민(小民) 가운데 상한 사람이 많고, 중인은 적으며, 사대부는 더욱 적었다.”3 이처럼 전염병의 위험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나, 사회적 하층에 위험의 노출이 집중되고 그로 인한 생계와 생활상의 위험과 함께 더욱 증폭된다. 이러한 계층적 차별과 불평등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2020년 발생한 COVID-19 감염자에 대한 사회 계층별 통계분석을 하면 명확히 드러날 것이다.
전체주의적 감시와 통제, 현대판 판옵티콘(Panopticon)
성공적인 COVID-19 방역으로 선전하는 K-방역의 핵심은 모든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감시하고 통제하는 IT-판옵티콘이다. 전국적으로 촘촘히 설치된 감시카메라와 무선통신망을 통해 의심자를 색출하고, 의심자의 상세 동선과 접촉자를 분 단위로 조사하여 격리하고 집중적으로 감시하는 IT-판옵티콘에 대해 한국인들은 거부감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긴다. 심지어 그것도 모자라, 사람들은 감염확진자와 그 접촉자에 관련된 상세한 추적 앱과 SNS에 열광한다. 그 결과, 한국인들에게는 IT-판옵티콘에 감시와 통제받는 것을 당연시하다 못해 열망하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그리고 COVID-19 감염에 대한 한국인들의 공포와 불안은 IT-판옵티콘으로 색출된 감염자에 대한 분노와 혐오의 화풀이로 전환된다. 그간에 심각해져 왔던 한국인들 간의 불화와 반목이 더욱 깊어져 가고, 각종 미디어는 돈벌이를 위해 마녀사냥과도 같은 여론몰이와 인민재판과도 같은 여론재판을 일삼는다. 그 결과, COVID-19에 대한 공포와 불안은 급기야 ‘우리 안의 파시즘’을 소환하여 타자에 대한 노골적인 집단폭력으로 표출하는 시대를 열었다. 특히, 사회의 저층민, 취약계층에서는 감염·사망자가 집중될 뿐 아니라, 생존 위기에까지 내몰리면서 극심한 공포와 불안으로 상호 간에 불화와 반목이 더욱 기승을 부린다.
COVID-19 대유행의 기회, 의료민영화의 기회
공공보건보다 자본이익을 우선시하는 보건정책에 따라 오래전부터 지방의 공공종합병원들이 경영난으로 폐업하고, 병원을 지키려던 의료진들이 결국 쫓겨나는 일들이 계속 증가해왔다. 점차 지방 병원들이 폐업으로 줄어들고 있던 차에, COVID-19 대유행을 접하면서 지방의 공공병원 부족이 사회적 안전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로 불거졌다. 정치권에서는 이때를 노렸다는 듯, 지방 병원의 부족이 지방 의사의 부족으로 인한 결과라는 논리를 내세우며, 그 해결책으로 지방 공공의대 설립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는 현 지방의 공공의료 문제를 왜곡하고 심각한 부작용을 낳을 것이기에, 의료계는 물론 의대생들까지도 공공의대 정책을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여기서 무엇보다 주목되는 점은, COVID-19 대유행에 맞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의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의사들의 공분을 일으키고, 심지어는 의사들을 ‘공공의 적’으로 여론몰이를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아무리 자본에 눈이 멀어도, 제정신에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십수 년 전 정부가 신자유주의의 모범인 미국 모델을 따라 강력히 추진했던 의학전문대학원 설립은 당연히 초기부터 실패가 예견되었고, 결국 기업형 병원, 즉 영리병원을 키우는 도화선이 되었다.4 그러나 정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의료민영화를 위한 정책과 사업 들을 끊임없이 시도해왔다. 이러한 동향은 지방 공공병원 문제와도 직·간접적으로 연결된다. 서울-수도권 및 지방 거점 대도시로의 인구집중 현상의 연장선에서, 서울-수도권 중심의 의료보험 수가 체계는 지방 병원의 경제적 존립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의료보험 수가 체계와 연계된 보건정책 또한 지방 병원 폐업을 방조하거나 조장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어왔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모든 문제는 자본의 문제와 직결된다. 그 체제의 틀 안에서의 유일한 해결 방법은 자본의 문제를 수정·보완하는 것뿐이다. 비록, 본질적인 문제해결이 아닌 임시방편일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따라서 지방 공공의료 문제 또한 의료보험 수가 체계의 수정·보완을 통해서만 조금이나마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에서는 지방 공공의료 문제해결이란 미명하에 공공의대 설립만을 밀어붙인다. 의료진들의 피나는 노력과 조금이나마 갖춰놓은 공공의료 체계 덕분에 COVID-19 대유행을 막아내고 있는 판국에, 그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버리려 하고 있다. 지방에 공공의대를 설립하면, 현 의료보험 수가 체계로는 지방 병원이 유지될 수 없는데, 그 의대생들은 어디서 의술을 연마할 수 있단 말인가? 의술을 제대로 연마하지 못한 ‘무늬만’ 의사들이 진료를 보는 병원이란 생각만 해도 악몽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공공의대 설립에 반대하는 의사들을 자신들의 이익에만 눈먼 이기적 집단으로 매도하는 여론 공작이 기승을 부리고, 한국의 대중은 의사들을 적대시하는 여론재판에 휩쓸리고 있다. 여기서 한국의 대중은 정치권에서 주장하는 지방 ‘공공의대’와 ‘공공의료’가, 병에 걸려도 병원에 가기 어렵고, COVID-19에 걸려도 치료조차 제대로 못 받고 죽어가는, 미국의 대중과 같이 되는 길이라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COVID-19에 따른 경기침체와 자본집중 그리고 새로운 계급사회
COVID-19로 인한 경기침체는 여느 경기침체 때와 같이 소자본이 대자본으로 흡수 통합되는 경향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특히, 영세소자본은 COVID-19에 영향을 덜 받는 대자본으로 급속히 흡수 통합되고 있다. 이는 막대한 자본투자를 해야 하는 AI(Artificial Intelligence) 기반 자동화·로봇화가 생산 및 서비스 전 분야에 걸쳐 급속히 확산할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다. 이로써 관련 전문기술을 갖추지 못한 수많은 기존의 노동자들은 실업자로 도태되고, 임금 격차는 더욱 급속히 커지게 된다. 또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두드러져 양극화가 심화된다. 이는 피케티(Thomas Piketty)가 밝힌 바와 같은, 지금까지의 미국 주도 시장경제 체제에서 자본소득이 노동 소득보다 지속해서 상승하여 자본집중과 부의 불평등을 심화시켜 온 동향을 더욱 강화하고 ‘세습자본주의’를 급격히 확대해 갈 것이다.5 결국 COVID-19 대유행을 계기로, 사회 계층 간의 명확한 단층들이 드러나면서 새로운 계급사회, 신자유주의적 카스트제도로의 길이 시작된다. 여기서 기존의 여론에 떠밀려 ‘입시전쟁’에 휩싸이고, 정처 없이 대학에 진학하여 졸업하고, ‘취업 전쟁’에 매진하는 대중은 결국 어떤 계급의 구성원이 될지 너무도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세습자본주의’가 만연되는 세상에는 ‘평등’과 ‘공평’이 존재할 수 없다.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여론몰이, 여론재판은 ‘불평등’이나 ‘불공평’의 실체를 은폐하고, 오로지 대중들에게 ‘평등’하고 ‘공평’한 사회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는 ‘희망 고문’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