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마음, 고이 담아 보내요

Nov 29, 2021 | Design Message

이주명_Rhi, Joomyung

이주명_Rhi, Joomyung

디자인예술학부 산업디자인학 전공교수

Sending my Prettily Packaged Heart

The designer has long contemplated what it is a designer must embrace to be a designer. Of course, I’m not the only one who thinks this way. If you are a designer, you will need this as you will need to know what your identity is. It is in the same vein that a designer in the field is thinking about what to eat for sustenance, and it is also the case that young people who are just starting out in design are desperate to find out what to learn and where to go. Isn’t it always true that everyone wants to know who they are?


디자이너는 무엇을 담고 있어야 디자이너라고 할 수 있을지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나만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모름지기 디자이너라면,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에 그게 필요할 것이다. 현업의 디자이너가 무엇으로 먹고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고, 이제 디자인을 시작하는 젊은이들이 무엇을 배워서 어디로 가야 할지 절박한 심정으로 찾아 나서는 것도 그렇다. 내가 누군지 알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언제나 같지 않을까?

가련한 마음

어떤 디자인회사를 운영하던 디자이너들과 수십 년 오랜 인연이 있었다. 나의 현업 시절 직장 선배였던 그 회사 사장님은 내 옆자리에 앉아 명료하고 멋진 스케치를 하곤 했다. 그 새로움에 반했던 순간부터 나는 그분과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10여 년이 지난 후 디자인회사가 잘 되려면 필요한 조건이 무엇일까라는 화두를 갖고 연구하던 시기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당시 자신의 회사를 크게 키워낸 그 선배를 찾아 한동안 그 회사 건물을 드나들며 교분을 나누었다. 그 이후 한동안 뜸해진 사이가 그래도 끈기지 않고 이어진 것은 연말이 되면 정기적으로 배송되던 그 회사의 달력 때문이었다. 월별로 다른 시를 여러 가지 시각적 표현으로 담아낸 것이었다. 보통 멋진 그림이 있던 자리를 시구가 온통 차지하고 있던 달력을 나는 매년 기다렸다. 그리고 새해 달력이 도착하면 한해 내내 시를 읽으며 보낼 수 있었다. 이제는 그 사장님도 은퇴하고 그 회사는 다른 모습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그 달력을 버리지 못해 여러 해 치를 선반 위에 올려놓고 있다. 그리고 그중에 한 장을 뜯어내 연구실 방문 밖에 붙여 놓았다.

조선 중기 운곡 송한필이라는 사람의 한시를 한글로 바꾼 것인데, 그 구절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어젯밤 비에 피었던 꽃 花開昨夜雨
오늘 아침 바람에 떨어지네. 花落今朝風
가련하다. 한 봄의 일이 可憐一春事
비바람에 오고 가는구나. 往來風雨中

봄이라 하더라도 꽃은 하루도 버티지 못했다. 꽃을 피운 자연이 다시 꽃을 거둬가기 때문이다. 어렵게 왔다가 쉽게 가는 것이다. 찰나에 대한 묘사가 모두 좋지만, 특히 내 마음이 가는 곳은 ‘가련하다’라는 부분이었다. 열두 달 중에 한 장만 뜯어 붙여 놓은 이유가 사실은 그 대목 때문이었다. 방을 드나들 때마다 ‘가련하다’라는 말을 입으로 읊어본다. 그러면 마음이 아련해진다. 왜일까? 그 이유를 뚜렷이 이야기하기는 힘들다. 단지 입에서 그 단어가 맴도는 그 순간이 내 몸속의 뭔가를 다시 일깨우는 것 같다. 살다 보면 어느새 잃어버리곤 하는 내 마음 제일 깊은 곳이 건드려지는 그런 느낌 말이다.

엊그제 60년 만의 10월 한파라는 것이 몰려왔다. 우리 마당의 다알리아 몇 송이는 그때를 견디지 못했다. 딱 하루 어쩌면 새벽녘 몇 시간에 그쳤을 영하의 기온에 맥없이 얼어버렸다. 얼음이 어는 그 지점은 전혀 거짓이 없었다. 혹시나 해서 둘러쳐 놓았던 비닐은 모두 날아가 버리고, 꽃잎과 이파리는 모두 흑녹색으로 변했다. 언제나 크고 선명한 진홍색으로 따듯한 가을을 선사하던 꽃이었다. 뿌리는 살았겠지만, 올해는 더 이상 다알리아를 볼 수 없구나라는 것을 알았다. 주변의 모든 생명은 쉼 없이 태어나고 사라진다. 생명 없는 것들만 그대로 있을 뿐이다. 갈 때가 되면 가야하고 우리의 힘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조금일 뿐이다. 그렇게 쉬이 갈 줄 알면서도 꽃을 가꾸는 것은 그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우리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랑이 언젠가 끝날 것을 아는 안타까움, 가련함이기도 할 것이다.

다알리아를 주신 동네 어르신은 버스정류장에서 일 킬로를 더 걸어가야 하는 먼 산 중턱에 살았다. 눈이 잘 안 보여 옆에 붙어야 알아보고 귀도 보청기를 낀 쪽만 들린다. 무엇보다 젊은 시절 사고로 손목을 하나 잃었다. 하지만 나는 그분을 동네의 현자라고 부르고 싶다. 지나다 길가에 서서 듣게 되는 옛이야기와 당부 말씀은 언제나 나에게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를 주었다. 어느 날은 그런 이야기 끝에 나를 당신 집에 데려가 다알리아 몇 뿌리를 주었다. 그래서 그 다알리아에 더 마음이 갔던 것 같다. 그분이 우리 집 앞을 오가실 때마다 멀리서나마 다알리아가 잘 크고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었다. 이제 뿌리를 캐서 상자에 담아 얼지 않을 곳에서 잘 보관해 내년의 만남을 기약하고 싶다.

공감과 선물

많은 사람들이 디자인의 방법으로서 최근에서야 새삼스럽게 깨달은 공감은 ‘너와 내가 같은 마음을 갖는다’라고 풀어쓸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디자이너로서 사용자라는 상대방을 갖는다. 공감을 디자이너의 입장에서 풀어본다면 나는 디자이너요 너는 사용자일 것이다. 공감이 제기된 것은 사용자의 깊은 마음을 이해해야 그것을 충족시키는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상업적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그 상업적 출발점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근원은 공감을 통해 디자인에 마음을 싣는 것이 정말 좋은 것을 만들 수 있는 궁극적인 출발점도 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공감, 마음으로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은 방법을 넘어서 디자인의 핵심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그리도 부르짖는 인간중심디자인(human-centered design)의 가치가 상대방에 대한 애정 어린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실현될 수 있겠는가?

나(주체)와 네(상대방, 대상)가 물리적으로 분리될 수밖에 없으니 너의 대상화는 안타깝게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공감하게 되었다고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데까지 이를 수는 없다. 우리는 그저 공감이라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끊임없는 노력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럼 그 노력은 어떻게 이뤄지나? 공감을 전제로 맺어지는 여러 인간관계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가족 간에, 친구 간에, 연인 간에 마음을 나누는 것과 디자이너와 사용자 간의 공감이 양자 간의 어떤 일치점을 찾는다는 점에서 그렇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관계 속의 마음은 물리적 선물로 표현되곤 한다. 디자이너-사용자 관계에서 제품을 디자이너가 드리는 선물이라고 본다면? 그래, 가능할 것 같다.

공감의 매개물인 선물(膳物)의 선이 뜻하는 바는 ‘찬을 차리어 권하다. 먹이다.’라고 한다. 누군가 먹을 음식을 준비하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엄마의 마음이 담긴 집밥을 좋아하고, 장터의 늙수그레한 아줌마가 끓여내는 뜨끈한 국밥을 먹으면서 ‘여긴 음식에 진기가 있어’라는 말을 할 때, 우리는 그 음식을 만든 사람의 마음을 부지불식간에 느끼고 있는 것이다. 가족에게 음식을 차려주고, 연인에게 줄 선물을 마련하듯 마음을 담은 디자인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당연히 마음을 먹는 것이 첫째일 것이다. 상대방인 사용자를 귀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회사에서 사람을 뽑을 때 면접을 치르는 것은 경력을 나열한 이력서만으로는 그 사람의 마음 됨됨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라는 말을 함부로 꺼내기는 조심스럽지만, 존중과 배려가 없다면 좋은 디자인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 디자이너의 마음이 있다면 상대방의 마음을 알고 싶다는 다음 단계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그래서 디자인 과정의 전반부인 ‘이해’의 단계가 공감을 목표로 이뤄진다.

엄마의 음식에 반찬 투정하는 아이를 보고, 밤을 새워 선물을 고민하는 연인을 보면, 사실 상대방의 마음을 알고 만족시키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래서 선물을 하는 것은 모험이기도 하다. 선물은 펴보는 순간까지 비밀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디자인이 좀 다행스러운 것은 선물을 받는 대상이 그 선물이 무엇인지 미리 알아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래서 디자인 과정을 통해 사용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을 참여시키며 그들의 마음을 알아간다. 그래도 선물이 갖는 서프라이즈 효과에 크게 문제가 없는 것은 사용자군은 훨씬 더 큰 반면 디자인 과정에 참여해 선물의 실체를 알아버리는 사용자는 몇 안 되기 때문이다. 디자이너의 마음이 제품으로 바뀌었을 때 대부분의 사용자는 여전히 서프라이즈 한 선물에 감동할 것이다. 그래서 인간관계 속의 선물하기보다 디자인하기가 좀 더 쉽지 않을까라고 생각해본다.

이제 정성을 다해 내 마음을 담아 선물을 준비한다. 일생을 통틀어 가장 고마운 사람의 생일이다. 어떤 것을 준비할까? 그 사람은 무엇을 좋아할까? 참 어렵다. 나는 양말 한 켤레를 산다.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자신의 정체성을 침대 안에 묶어두고 있는 그는 이제 걷지 못한다. 신발도 신지 못한다. 걸을 수 있던 시절조차도 한 켤레 밖에 없던 그의 신발이 이제는 신발장에 머물러 있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양말을 산다. 이불 바깥으로 삐져나온 그의 발을 보면서, 수많은 곳을 다녔겠지만, 이제는 쓸모없이 붙어있는 그 발을 나는 또 생각하게 된다. 더 이상 필요 없어도, 쓰이지 않는 것이라도 그의 몸뚱아리에서 제일 먼 곳에 붙은 그것을 따뜻하게 해주고 싶다. 그가 ‘나는 필요치 않다’고 할지도 모른다. 평생 뭐가 좋다고 원하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던 사람이다. 필요해도 필요하지 않다고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걷지 못해 필요도 없는 양말을 좋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주고 싶다. 그는 잘 모르지만, 이제는 거의 남지 않은 그의 소지품에, 거추장스럽더라도 하나 더 보태주고 싶다. 설령 그가 신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 마음은 그렇다.

2021년 연세 산업디자인 공동체 여러분 모두 고생 많았습니다.
제 마음, 고이 담아 보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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