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daily life is a series of survival competition to stand in front “quickly quickly” ahead of others to survive. In the ordinary survival competition that is spread just like a horrible battlefield, everybody becomes kelpi which intends to pull down and trample people next to me in order to raise oneself a little targeting the same point. Children are not interested in any major, without a hope for being an expert, only concentrating on “employment war”. Have you ever tried to find your own way that your heart goes ahead and body heads for, not the way others direct and go? Those who have a will in design could stop today’s evil design that creates the world just like the hell, only by preparing one’s own way and polish their technique.
地獄 (HELL)
최근 접하고서 뇌리에서 떨쳐 버릴 수 없었던 말, 헬조선. 헬(Hell)과 조선(한국)의 합성어로, 현재 한국의 여러 상황이 지옥과 같다는 뜻이라고 한다. 올해 초여름부터 확산된 이 신조어는 그간의 걱정이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지난 2007년 12월 대선에서 사람들이 파국(破局)의 길을 선택했을 때 당혹감과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리고 2012년 김재환 감독이 발표한 『MB의 추억』에서,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J. Goebels)의 “우리가 강제한 게 아니야. 그들이 우리에게 위임했지”라는 말을 인용하여 허황된 선거공약을 믿고 따르는 것의 위험성을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파국을 향해 치달았다. 이때 “매도 먼저 맞는게 낫다”라는 말처럼, 하루하루 고통 받는 파국으로의 긴 여정보다는 차라리 빨리 파국을 맞아 새 출발의 기회가 앞당겨지는 것이 낫다고 위안을 삼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새 출발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서 파국의 낭떠러지에서 영영 헤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이 엄습했다. 다시 말해서, 지옥(地獄)의 불구덩이로 떨어져 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었다.
한국은 OECD회원국 중에서 멕시코 다음으로 가장 긴 시간 노동을 하면서도, 7명 가운데 1명은 최저 임금 이하로, OECD 평균의 약 3배에 달할 정도로 소득의 양극화가 심하다. 국민의 일과 삶의 균형은 36개국 중 33위, 건강은 31위, 환경의 질은 30위로 최하위에 속하며, 자살률은 OECD 평균의 2배가 넘는 심각한 수준을 보인다. 이 통계들은 지옥과도 같은 헬조선의 상황을 대변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조선에 태어나 노오력이 필요해” 또는 “흙수저 빙고게임하며 노올다”라는 말들이 유행하는 현상을 계층상승의 사다리가 끊어져서 “흙수저”는 “금수저”처럼 성공할 수 없다는, 좌절된 계층상승 욕망에 대한 것으로만 느끼고 해석한다. 이는 “금수저”를 갈망하는 “흙수저”들 간의 시기와 질투, 더 나아가 서로에 대한 비방과 폭력의 위험을 드러낸다. 죽창으로 서로 찌르는 상상을 구호화한 온라인 현수막의 “죽창 앞에서는 공평하게 너도 한방, 나도 한방”이라는 섬뜩한 표현처럼 말이다. 이 위험이 현실화되는 곳이 바로 지옥의 불구덩이다.
지옥과 같은 일상의 생존경쟁
한국의 일상은 살아남기 위해 남보다 “빨리 빨리” 앞 줄에 서려는 생존경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는 한국전쟁을 통해 사람들에게 각인된,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벌이는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이 베이비붐 세대로 불리는 전후 세대에서 더욱 치열하고 비열하게 확산되었고, 오늘날 휴전상황에서 자식세대에까지 계승된 결과이다. 하루 아침에 생존기반을 상실할 수 있다는 공포, 살아남기 위해서는 온갖 멸시와 천대를 견디며 권력자에게 아첨하며 붙어있어야 한다는 자괴감 등은 전후 세대들을 어릴 적부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과 출세를 해야 한다는 가혹한 생존경쟁으로 내몰았다. 그렇게 성장한 전후 세대들은 가까스로 지켜낸 계층에서 자식들이 밀려나지 않고 계층 선발전의 승자가 될 수 있을지 노심초사 하고, 그러한 생존의 불안감은 자식들을 둘러싸고 더욱 비열하고 치열한 경쟁을 불러왔다. 이러한 현상은 엘리아스(N. Elias)가 밝힌 것처럼, 조국근대화 과정에서 확산된 신분상승욕구가 강한 중산층에서, 특히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추락한 중산층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입시전쟁”, “취업전쟁” 등이 그 지옥과 같은 경쟁의 단적인 예이다.
참혹한 전쟁터와 같이 펼쳐지는 일상의 생존경쟁에서는 모두가 동일한 곳을 향해 조금이나마 위로 올라서려고 옆 사람을 끌어내리고 짓밟는 물귀신이 된다. 이러한 삶은 입시지옥을 향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쟁을 통해 일상이 되고, 여기서 옆 사람은 경쟁 대상이고 적일 뿐이다. 그 과정은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아래 사람을 철저히 짓밟으면서 이용해야 함을 학습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로써 선배가 후배에게,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고용자가 피고용자에게 행하는 “갑질”은 점점 더 일상 깊숙이 파고들어 만연하게 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사람들이 자신이 당한 “갑질”을 대갚음할 수 있는, 자신보다 아래의 약한 희생양을 찾으려 혈안이 된다는 점이다. 그 반면에, “갑질”을 행하는 상대방에 대해서는 반감을 갖으면서도 매우 나약함을 보이며 심지어 복종적이기까지 하다. 더욱이 그보다 상위에서 벌어지는 “갑질” 폭력은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설사 본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 폭력을 찬양하고 맹종한다. “서러우면 출세하라”는 말이 끊이질 않고, “서러우면 돈 벌어라”, “부자 되세요”라는 유행어처럼 모든 것이 돈을 기준으로 더욱 서열화·세분화된다. 그렇게 서열이 세분화될수록 상위계층은 신분상승욕을 불태우는 위협적인 하위계층으로부터 멀어지고 안전해지는 반면, 하위계층은 자신들 내의 세분화된 서열을 놓고서 물귀신처럼 서로 간의 치열한 생존투쟁을 벌인다.
최근 “하위 50%가 가진 자산은 전체의 2%에 불과”하고 “상위 10%가 전체의 66%”를 갖고 있으며 “상위 1%가 전체의 26%”를 차지하고 있다는 통계가 발표되었다. 또한 금수저, 흙수저 논란에 대해 “금수저는 자산 20억 원 또는 가구 연 수입 2억원 이상, 은수저는 자산 10억 원 또는 가구 연 수입 1억 원 이상, 동수저는 자산 5억 원 또는 가구 연 수입 5500만 원 이상, 흙수저는 자산 5000만 원 미만 또는 가구 연 수입 2000만 원 미만”이라고 기준을 알리는 보도까지 나왔다. 이러한 보도만으로도 하위계층이 전체 2%의 자산을 놓고, 중간계층이 전체 32%의 자산을 놓고 서로 간에 세분화된 서열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상위 1%, 특히 최상위 0.3~0.5% 층은 아래 계층에게 보이지 않는 안전한 고지를 점하고 있다는 현실을 자명하게 설명한다. 또한 전쟁과 학살 및 대재앙의 참혹함이 언제나 하위계층에 집중되어왔듯이, 하위계층은 가장 심각한 위험들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직접 맞닥뜨리고 있다. 그리고 중간계층은 하위계층으로의 추락이라는 공포 속에서 안전한 상위 10% 계층에 도달하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치열한 생존투쟁을 벌인다.
모든 지배 질서와 권력에 대한 부정과 불복종
사람들은 계층상승의 사다리가 끊어져서 “흙수저”는 “금수저”처럼 성공할 수 없다는 현실을 애써 부정하려 하고, 자식들을 남들처럼 성공하여 잘되라고 등을 떠미는 곳이 서로 죽고 죽이는 생존경쟁의 지옥이라는 현실을 외면하려고만 한다. 그래서 그들은 오히려 오늘날의 권력지배구조를 당연시하고 “SKY”로 대변되는 좋은 학벌이 성공의 지름길이라 맹신하면서 자식들을 “학벌전쟁”의 지옥으로 밀어 넣는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SKY”를 숭배하면서 스스로를 학벌서열에 줄 세우고 열등감과 자괴감에 휩싸여 “(묻지마) 취업전쟁” 터로 돌진해 나간다. 대학은 서열화된 학벌 매장으로 전락한지 오래고, 기업은 몰려드는 (단순) 노동력을 입맛대로 골라 소비한 후 내버리는 것을 당연시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음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과 같이 비전문성이 전문성을 대체하고, 아이들은 “취업전쟁”에만 골똘하여 더 이상 그 어떤 전공에도 관심이 없으며 그 어떤 전문가도 되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디자인을 전공한다는 학생들 역시 눈을 뜨지 못하고 전문능력 또한 기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디자인 전문가가 될 수 없기에, 지금까지 디자이너라면서 끔찍한 지옥을 만들어온 사람들과 같이 되지는 않을 거라고 위안을 삼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의 세태에 발맞춰 지옥의 불구덩이인줄도 모르고 가만히 떠밀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노심초사하게 된다. 지옥으로 향하는 행렬인줄도 모르고, “가만히 있으라” 한다고 모두다 눈감고 가만히만 있을 것인가?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놋쇠의 성』 이야기처럼 모두다 마법에 눈이 멀어, 한결 같이 죽음을 향해 가만히 떠밀려만 갈 것인가? 부모와 부모세대가 지금까지 결정한 대로, 떠미는 대로, 그 대로 눈 가리고 귀 막고 가만히 앉아 지옥으로 떠밀려만 갈 것인가? 지금껏 배워왔던 모든 정의와 도덕, 윤리 등이 약육강식과 승자독식만을 칭송하며 부추기는데도 옳다고 믿고 따를 것인가? 한 줄 세우기 출세경쟁으로 내몰아 미천한 삼류 인간, “루저”라고 낙인찍는 지배권력에 맹종하고 그 권위를 떠받들 것인가? “금수저”가 만드는 서열을 무시하고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한 줄서기 경쟁을 따르지 않으면 이류 삼류의 굴레에서 절로 벗어난다는 것을 정녕 모른단 말인가? 부모와 부모세대가 가리키는 길이, 지배권력의 이데올로기가 사탕발림하며 몰아가는 길이 바로 한 줄서기에서 조금이라도 위로 올라가고자 서로 물고 뜯는 생지옥의 길인데도, 그 길 외에 다른 길이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단 말인가?
남들이 가리키고 남들이 가는 길이 아닌, 자신의 마음이 가고 몸이 향하는 자신의 길을 찾으려 하고 선택하려 한적이 있는가?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에 가치를 두고 “금수저”의 서열에 같이 서고자 하는 허영된 출세욕망을 떨쳐버린다면, 자신을 진정 사랑하며 아끼는 인간다운 삶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몇몇 사회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금수저”를 버리고 모두 다 인간답게 저마다 자신의 길을 여는 전문가로 활동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디자인에 뜻이 있는 이들은 그렇게 자신의 길을 준비하고서 디자인에 대한 저마다의 기술을 갈고 닦아야만, 지옥과 같은 세상을 만드는 오늘날의 사악한 디자인을 중단시킬 수 있을 것이다.
非常識이 常識이되고 서로가 서로를 害하는 일상이 번져나가는 해에, 검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