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ign treats the world of artefact. Stage of love that reveals beauty is not from the loved products but from the loving people, regrettably, design direction is ambiguous. Instead, how about designers love their own work? Just as mother’s heart who grows her children by embracing them warmly and preciously. If designing process is such nurturing period, wouldn’t we have to be cautious just as the heart of dating with the one to be newly born, stroking belly with big expectation? Though it’s a fate to give it in marriage as soon as it’s born, however I should give it by making a condition to be loved by mother-in-law. How could she love my design as she sees her pretty daughter-in-law? To do so, basic is important. Design that does its devour is lovely. Also, love ripens for a long time. To use long, it should be firm. It is important to pursue the basis beyond short-term trend. To do so, something beyond trend is necessary. It would be ideal, if the mother, designer, is wise enough to grow the product to be a pampered child but a pillar daughter-in-law who firmly performs her role. Just as daughter-in-law, product also requires make-up, plastic surgery, and refinement. However, above all, designer’s sincere loving heart creates ultimate beauty. This writing started rambling, however now I’m satisfied, since it seems to have quite reached conclusion…
어린 시절 아름다움에 대한 자각은 별로 없었다. 다만 어떤 계기가 있을 경우, 예컨대 옷을 잘 입고 싶은 욕구, 누가 날 어떻게 볼 것인가와 같은 생각들이 나를 사로잡을 때 아마도 이것이 아름다움과 관계된 나의 경험인가라고 돌아보는 정도였다. 크면서 길을 지나며 마주친 눈길을 끄는 것, 뭔가 나를 정화시키는 느낌을 주던 것, ‘아름다움’ 을 언급한 다른 이의 말을 듣는 것이 수용자로서 내가 갖는 아름다움에 대한 경험이었다. 차츰 감상이나 내 느낌을 넘어 수용자가 아닌 발신자로, 생산자로서 아름다움을 생각하게 된 것은 소위 아름다움을 공부하는 ‘미대’ 를 진학하는 시기 전후였을 것이다. 그때부터 내가 접하는 ‘아름다움’ 의 성격은 적극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내가 그리는 무엇, 만드는 무엇이 아름다운지 고민하였다. 하지만 잘 알 수 없었고 자신이 없었다. 제법 큰 인문대 강의실에서 들었던 ‘미학개론’ 수업이 그런 고민을 풀어준 것은 아니지만 수업 한 대목은 지금도 생생하다. 담당 교수님께서는 칠판의 위에서 아래로 미선진이라는 한자를 쓰셨다. 미선진, 생소하지만 새로운 용어는 아니었고 다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진선미(眞善美)의 순서를 거꾸로 쓴 것이었다. 미를 따지는 미인대회에서조차도 진을 가장 높은 등급으로 삼고, 그 다음을 선과 미로 순서를 매기는 것과 달리 교수님은 미를 가장 높은 경지로 설명하였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때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ref]‘다음과 같았으리라’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 같다. 내 기억에 대한 확신이 없다. 선생님의 책을 다시 읽어보면 그 답이 있을 것 같지만 지금 확인할 필요는 별로 느끼지 않는다.[/ref] 진은 세상의 원리, 선은 윤리적 가치, 미는 정서적 쾌락을 의미하는데 이는 인간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를 말한다. 진은 인간성의 개입 없이도 존재 가능하니 스스로 가장 고양된 상태인 미를 가장 인정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진은 우리 바깥에 있다. 선은 이성적으로 우리가 만든 인공물인 도덕적 기준에 우리를 맞추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미는 바로 우리 자신 그대로다. 바로 자기 가슴이 울리는 것에 기초하고 있으니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 바로 그것 아닌가? 아름다움은 사람의 정신과 몸이 깨어나는 순간의 쾌감과 관계된다. 그동안 퇴폐적이며, 쓸모없고, 표피적이라는 이유로 미를 천대하는 장면은 우리 생활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는데, 미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그 말씀은 내 어깨를 으쓱하게 하였다.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나름대로 이해했다고 하여도 여전히 아름다움을 만드는 작업은 쉽지 않았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새벽까지 물고 늘어져야 생각과 표현이 정화되는 느낌은 확실히 더 건강에 해로운 것이 되었지만 그래도 그것만큼 확실한 보장은 별로 없는 것도 같다.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좋은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일상으로부터 배운다. 우리의 전문 직업이 아름다움을 다룬다고 하여도 그 기원은 매일 반복되는 우리 삶이다. 누구든 매일 여기저기서 감각으로 느끼며 아름다움을 접하고 또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아름다움이 다음 4가지 방식으로 만들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확고한 체계인가라고 묻는다면 쉽게 그렇다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무엇이든 자유로이 말할 수 있는 와이아이디의 장점을 살려 풀어내 보고자 한다. 아직 어설프지만 화장과 성형, 교양과 사랑이 그것이다.
먼저 ‘화장’ 이다. 여인은 아침마다 거울을 마주하고 하루를 준비한다. 길게는 1시간 이상, 짧게는 10여분(?) 동안 자신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얼굴에 ‘그리는’ 것이다. 화가 뺨치는 다양한 도구와 물감, 기법이 동원되어 개인이 진행하기에는 상당한 난이도를 갖고 있지만 대부분 여성은 어린 시절부터 관심을 기울이고 연습하므로 그리 어렵지 않게 구현한다. 헤어샵, 뷰티샵의 전문적인 서비스도 있고, 머리를 만진다든지, 옷을 입는 것, 장신구 같은 장식물들이 화장과 비슷한 정도의 노력으로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방식이다. 비교적 짧은 시간이 들고, 누적되면 많지만 1회를 위해 들이는 비용이 많지 않다. 또한 간편히 지우거나 벗어버릴 수 있어 언제나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으며 그 다음날 또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화장을 하고 옷을 입거나 피부 관리를 하는 이유를 누군가는 자기만족이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다른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도 하지만 모두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는 측면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화장한 이를 보는 사람은 그야말로 표피의 정보를 본다. 그 반응은 먼 거리에서도 찰나적으로 이루어진다. 예컨대 우리는 거리를 걸으며 아름다운 이를 발견하고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짓는다. 하지만 근접할수록 자세한 정보가 머릿속으로 들어올수록 그것이 섣부른 판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때로는 자신을 감추기 위해 변장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화장으로 대표되는 표피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방식은 기만적일 수도 있다. 화장은 투입 대비 효율이 뛰어난 매우 강력한 아름다움 구현법이다. 하지만 그 효과의 지속 시간은 짧고 표현이 내면을 반영하는 가에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비용 대비 효과로 인해 디자인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면서 또한 그 때문에 디자인이 평가절하 되는 방법이기도 하다. 사물을 화장시킬 수 있는 수많은 후처리공법들이 지금도 개발되고 있으며 수천 개의 신제품이 옷을 갈아입고 런웨이로 나간다.
겉에 분을 발라 피부의 톤을 바꾸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형상을 바꿀 수도 있다. 바로 ‘성형’이다. 성형은 보통 수술을 연상하게 하지만 여기서 의미는 섭생이나 운동 같은 형태를 바꾸는 방법 모두를 포함한다. 성형 후 화장을 하는 경우도 많지만 잘 만들어진 형태는 굳이 화장을 안 해도 그 자체로 완벽하다. 이목구비가 이미 제 자리에 있으면 밝은 색으로 도드라지게 할 필요도 없고 광대뼈를 짙은 색으로 덮을 필요도 없다. 성형은 화장 따위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예컨대 키를 늘릴 수도 있고 실루엣을 S자로 만들 수도 있다. 비례는 매우 중요한 미의 변수다. 8등신과 작은 얼굴은 그래서 중요하다. 키가 크고 작은 것은 그렇게 차이를 만들어 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모습은 대개 가장 유혹적인 젊음을 모방하거나 권력의 냄새를 풍기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성형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수술을 한다면 그 자체는 얼마 걸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갑자기 몸에 찾아온 불균형을 자신 만의 균형으로 자리 잡아가는 데에는 제법 시간이 많이 걸린다. 식사량을 조절하거나 종류를 바꾸고 운동하는 것은 꾸준함이 생명이다. 결국 그것은 생활 습관을 새로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예컨대 뱃살을 빼는 것은 만성질환과 합병증을 염려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잘 진행된다면 나는 나의 몸을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이 되는 자부심도 얻게 된다. 지금 말하는 성형은 삶의 육체적 형식을 바꾸는 지난한 작업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명으로 이런 작업은 지속된다. 인간을 수술하는 것과 달리 인공물의 성형 즉, 형을 바꾸는 작업은 상대적으로 매우 자유롭다. 디자인은 사물의 조물주처럼 아예 새로운 구조로 형태를 확 바꾸어 버린다. 하지만 건강성이 사람 몸의 기초인 것처럼 디자인의 대상도 건강한 특징을 가져야 오래 갈 수 있다. 그러려면 구조와 형태는 꼭 필요한 부분에 필요한 요소가 자리 잡아야 하고 그것이 디자인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아는 아름다운 사람 중에는 때로 분도 바르지 않고, 몸을 만드는 데도 별 신경 쓰지 않는 그런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예의바르지만 거만하지 않고, 동작이 느리지만 게으르지 않은 그런 사람이다. 음성은 나지막한데도 필요한 단어는 명료하게 표현하고, 왠지 향기가 나는 듯이 느껴져 가까이 있으면 아늑하고 기분 좋은 그런 사람, 바로 ‘교양’ 있는 아름다움이다. 교양은 대개 배움으로 이루어진다. 꼭 제도권 교육이 아니더라도 배운 집 자식은 다르다. 교육은 지식을 쌓고 때로 능숙한 직업인을 길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교육의 근본은 사람을 만드는 일이 아닐까? ‘제대로 배운 사람’ 은 삶 전반을 바라볼 줄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자기반성을 통해 성찰에 이를 확률을 높일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교양이 분절된 지식으로 들뜬 화장처럼 표피에서 겉돌면 역겨움이 스며 나온다. 그런 사람들을 속물이라 하는데, 무릇 배운 자라면 누구든 한 순간 그렇게 될 수 있음을 경계하고 한없는 겸손함으로 자신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끊임없이 세상을 공부하고 자기를 갈고 닦는 수양으로 자신을 연마하면 ‘아름다움’이 만들어진다. 화장을 안 해도, 성형을 안 해도 그 미소가 당신을 끌어당기는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그렇다면 교양 있는 ‘아름다운’ 제품은 무엇일까? 성찰하는 제품[ref]성찰하는 제품이란? 인공지능은 마치 사람처럼 스마트하다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때로 스크린 뒤의 존재가 마치 사람인양 착각하였다는 사례는 이제 흔한 것이 되었다. 또한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컴퓨터가 스스로 지식을 축적하고 행위를 통해 반성하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 자신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은 인정되고 있다. 그때가 되면 제품은 성찰의 길에 들어설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닌 기계의 성찰이다. 인간과 기계는 전혀 다른 존재이고, 아름다움의 한계는 우리 종의 범위에 속한다. 아름다움은 공감을 전제로 한다.[/ref]까지는 아니더라도 예의바른 제품, 품위 있는 제품은 지금도 디자인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제품이 자기의 역할을 매끈하게 처리할 수 있다면 ‘성실한 제품’ 이라 부를 수 있겠다. 또한 그 처리 방식이 거칠거나 폭력적이지 않고(즉, 안전하고) 사용하는 사람을 배려하는 소통을 한다면 예의바르거나 품위 있다는 수사를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모든 사물에는 두뇌가 달려야 하는데, 그 두뇌는 점점 더 발전해서 자기들끼리 통신한다. 오래전부터 큰 관심을 갖고 인간과 사물의 소통방식을 구성해 온 디자인은 이제 ‘바람직한 경험’ 이라는 단어로 무형적인 아름다움에 도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