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단과 해방의 기로에 서서….

Nov 23, 2020 | Design Message

이주명_Rhi, Joomyung

이주명_Rhi, Joomyung

디자인예술학부 산업디자인학 전공교수

Standing at a crossroad of blocking and liberation….

The designer should know evidently what should be blocked in order to design the blocking. The blocking existed in the meantime and exists now. The upper classes in many countries with restless political situation are living inside the closed rampart. It is neither a fantasy nor blue future, but it real exists. It is the society where the class blocking revealed as physical blocking. But our society refuses it. Our universal virtue teaches us not to do it even though it is not complete. I am not entitled to rebuke those who chose the rampage, but I feel the people living therein too sad. It is because they blocked themselves.
Enforcing and blocking may be unavoidable. But we do not want such society, such space and such living fundamentally. Even thinking the losing our native shape is terrible as we are accustomed to it. So that, the thing to be done by design is unequivocal. How does it for human being not to lose its native shape? Being humane may be the most important our virtue as we are human. What is it? Can we be free anyhow even though we will be controlled endlessly? I am asking again and again as I don’t know what it is. There is no other way without asking each other or alone.


만남의 한계

그동안 우리는 차츰 밀착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아파트 위아래 층이 서로 모르고 지낸다는 한탄으로부터 동네 사랑방이 만들어져 다행이라는 안심과 결기로 모이는 광장까지, 낮에는 엄마들로 가득 찬 카페에, 밤에는 친구들이 술잔을 기울이는 주점과 하하 호호 웃음꽃이 피는 따뜻한 가정까지…. 머리를 맞대고 둘러앉아 의논하고, 손을 맞잡고 기도하며, 뺨을 비비면서 애정을 표시하였다. 사랑하게 되면서 연인은 점점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자정이 가까워 어쩔 수 없는 이별은 너무나 안타깝기만 하였다. 인간은 그런 동물이다.

근대화 이후 개인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개인은 결코 혼자 살 수 없고 함께 살아야 한다는 생각도 더욱 강해졌다. 우리는 즐거운 삶을 위해 만나기도 하지만 교류의 장점은 우리가 일하는 방식도 바꿔놓고 있다. 이른바 개인의 창의성보다 집단적 창의성이 더욱 필요해지고, 팀워크를 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이 제기되는데, 공간 공유는 접촉을 늘리는 대표적인 것이다. 기업은 개인의 자리를 없애버리고 회의실과 협업 방식에 더 신경을 쓴다.

하지만 2020년, 우리는 이른바 언택트 시대의 초입에 있다. 이렇게 산지 거의 열 달이 지나버려 초입이라 하기엔 이미 늦었는지 모르지만 앞으로 이어질 시대의 흐름을 본다면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잘 모르는 ‘초입’인 것 같다. 이미 피로하고 상황에 둔감해져 가고 있지만 전 세계적으로 확진자 곡선은 가파르고 이제는 대처를 포기한 듯한 국가도 등장하고 있다. 모범적인 한국 사회도 전문가들은 확진자의 발생 건수가 조금 더 많아지면 보건 시스템의 붕괴가 시작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정부는 신조어 ‘사회적 거리 두기’를 공식화하였고 이제 우리는 그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계별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가장 핵심은 ‘차단, 차단, 차단’이다. 감염은 물을 통해, 음식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만남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지구촌, 세계화로 이어지는 ‘만남의 시대’는 이제 가치를 잃고 있다. 인류는 이제 ‘만나지 말아야 할 시대’로 들어서고 있으니 2000년대를 말하는 새로운 밀레니엄의 실제 모습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인가?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게 제안하는 행위1로서 디자인은 지금도 도구를 만들고 있다. 디자인은 정교한 방법이라기보다 인간의 문제를 대하는 애정 어린 관점과 몸으로 만드는 결과, 마음을 실은 정성이라 할 수 있으니 누구나 배우기 쉽다. 하지만 디자이너는 매번 디자인하고자 하는 특정 도구와 도구를 둘러싼 환경을 이해해야 한다.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어떤 것이든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차츰 코비드 상황을 이해해가고 있다.

차단에 적응한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현재 인류가 겪고 있는 최우선 관심사이니 디자인은 당연히 ‘차단’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마스크와 선별진료소로부터 시작된 그 관심은 차츰 일상으로 확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새로운 기준, 즉 ‘뉴노멀’이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라고 예고한다. 아마도 ‘차단 친화형’2으로 말이다. 가장 효과적이면서도 단순하게 빠른 실행이 가능한 ‘차단형’ 대책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코비드 19는 기본적으로 공기로 전염되고 바이러스는 사물의 표면에서 상당 기간 생존해서 접촉전염의 위험성도 안고 있다. 그러니 차단은 공기전염 방지, 접촉전염 방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모든 장면에서 바이러스가 날라 와 나의 몸으로 들어올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는 데 주력한다. 핵심 해결책은 내 얼굴의 열린 부분을 모두 막는 것. 하지만 그 부분을 통해 우리는 숨 쉬고, 먹으니 ‘제대로’ 막아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원하면 열려야 하고, 바이러스를 걸러야 한다. 어쨌든 막아야 하니 마스크라는 의료 현장의, 공사 현장의 도구들이 어쩔 수 없이 일상과 만나 현재가 비상 상황임을 느끼게 해준다. 마스크가 일상 용품의 반열에 오르려면 아직 멀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묵묵히 잘 따르고만 있다.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 일상의 자유를 이렇게 속박하는 도구를 일찍이 만난 적이 없음에도 말이다. 생각해보면 마스크가 싫다던 유럽인들이 정상인지도 모른다.

아예 시설과 공간으로 대처하는 방식도 생겨나고 있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그야말로 공간적 해결책 아니던가? 멀리 떨어져 서고, 투명 칸막이를 해서 당신의 비말 직사포를 막을 수 있는 대비를 한다. 공간은 다양한 주변 요소들과 특히 통합적이어야 하는 데다가 구축 비용이 상대적으로 많이 들기 때문에 보다 종합적인 계획을 세워 대처해야 한다. 보건의료의 중심이자 최후의 보루인 병원은 특히 차단된 공간으로서의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이제 모든 공간은 거리 두기라는 새로운 인간의 요구에 맞춰 디자인될 것이며 그것은 어쩌면 새로운 기준으로, 새로운 법규로 자리 잡을 수도 있다. 접촉전염을 막기 위해 손 씻기가 중시된다. 손 씻기 외에 아직 손의 움직임이나 장갑 등을 통해서 어떻게 효율적으로 감염의 위험을 벗어나는지 관계가 더욱 명확해지면서 새로운 디자인의 가능성이 움튼다.

사실 보면 인공물의 세계 자체에 미치는 펜데믹의 영향은 이런 ‘차단’의 방식을 취하면 되는 비교적 단순한 것이다. 그보다 더 큰 영향은 차단이 미치는 인간 사이의 관계에 있다. 가족조차 격리되고, 될 수 있는 대로 사람을 만나지 않으며, 밥은 혼자서 먹는다. 그동안 따뜻함을 나누던 ‘인간의 방식’은 모두 ‘접촉’을 전제로 하였다. 가족은 생활을 같이하고, 친구는 만나고, 밥을 같이 먹는 것이다. 한국의 일상 인사인 ‘언제 밥 한번 먹자’가 때로는 그냥 빈소리라는 이야기를 듣기는 해도 그 덕분에 밥 한 끼 같이 먹을 수 있었다. 이제는 그 인사는 사라질 위기에 있다. 밥을 꼭 먹어야 하는 관계라면 조금 약화하는 수준이겠지만 밥을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는 애매한 관계는 빠르게 소멸할 것이다. 이제는 그동안 오가다 맺어지는 관계의 가능성은 생략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가족 나들이, 생일, 소풍, 엠티, 결혼식, 집들이, 회식, 돌잔치, 회갑 잔치, 동창회, 추석, 설날, 기념식, 그리고 장례식.. 앞으로 인간의 사회적 소통을 만들었던 모든 의식은 변화할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모든 인공물도 적응해 나갈 것이다. 디자인도 마찬가지로.

그래도 자유로워지고 싶다

문제는 비비고 사는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 질문이다. 사실 우리에게 차단은 처음이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불꽃이 올라온 가스레인지에서 떨어져 선다. 우리는 동물원의 코끼리에게 함부로 다가가지 않는다. 깜깜한 밤, 낯선 이는 경계의 대상이다. 불시에 발생하는 위협에 대처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경우라면 미리 차단하는 방법을 사용해온 것이다. 그러니 삶은 또 그런대로 이어질 것이다. 대신 위협이 대폭 증가하는 만큼 안전은 디자인의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차단을 디자인하기 위해서 디자이너는 무엇을 어떻게 차단해야 하는지 뚜렷이 알아야 한다. 그동안 차단은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한다. 정정이 불안한 상당수 국가의 상류층들은 폐쇄된 성벽 안에서 산다. 이것은 판타지나 우울한 미래가 아니라 이미 실존하고 있다. 계급의 차단이 물리적 차단으로 드러난 사회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것을 거부한다.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의 보편적 가치는 그러지 말라고 가르친다. 성벽을 선택한 그들을 비난할 자격은 없지만, 나는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너무 안타까워 보인다. 자신을 스스로 가둔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우리 시골집은 길과 길 사이에 있다. 두 길 사이를 오가는 지름길은 우리 집 마당이다. 그러다 보니 가끔 우리 마당을 횡단하려는 사람들이 있곤 한다. 평화로운 우리 집 마당을 낯선 사람이 지나가는 모습이 썩 내키지는 않는다. 그래서 울타리를 세우고 문을 달아야 하는지 언제나 고민이다. 결국 마음을 먹고 울타리 재료를 사다 놓았지만,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언제가 문을 달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가급적 그 시기를 늦추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현관에 나와 앉아 보면 길가의 낙엽도, 길 너머의 코스모스도, 앞 언덕의 단풍나무도, 멀리 산에 걸린 구름도 모두 우리 집 안마당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벽을 치면 그때부터 우리 집 안마당은 거기까지가 된다. 수년 전 도난 사고가 났을 때 벽을 쳐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벽의 필요성은 사라졌다. 시골에 와서 벽을 치고 사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은 없다는 생각도 든다. 자꾸 거슬리는 일이 생긴다면 어쩔 수 없이 또 벽이라는 해결책이 또 떠오르겠지만 말이다. 그때를 걱정해서 지금 벽을 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우리가 가진 해결책은 모두 이와 같을 것 같다. 통제와 차단은 불가피할 수 있다. 다만 우리는 그런 사회, 그런 공간, 그런 생활을 근본적으로 원하지 않는다. 거기에 익숙해져 우리 본연의 모습을 잃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러니 디자인이 해야 할 일은 뻔하다. 어떻게 하면 인간의 모습을 잃지 않도록 할 것인가? 우리가 인간인 만큼 인간적인 것은 우리의 가장 중요한 가치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끊임없이 통제받겠지만 그래도 어떻게 하면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인간의 도구는 어떻게 자유와 해방을 위해 봉사할 수 있을까?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할지 잘 모르니 자꾸 묻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스스로 자꾸 묻는 수밖에 다른 도리는 없을 것 같다….


  1. 이때 도구는 이미 사용해 온 도구일 수도 있고, 새롭게 도구가 만들어질 수도 있는데 그 초점은 인간의 사용에 있고 디자이너는 그것을 제안한다. ↩︎
  2. 영어로 한다면 shutdown-friendly, 아니면 더 적극적으로 quarantine-friendly? 그 귀결은 폐쇄사회나 격리사회. 과거 유럽이 위생 보건을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던 것처럼. 누구도 거역하기 힘든 전체주의의 냄새가 난다… 누구나 스스로 통치자라 자임한다면 전체주의라는 도구가 달콤하게 느껴질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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