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ountry House and Design
After types of professions have been divided into more specific fields, modern design’s role has been defined as more planning than practicing. Production has been allocated for factories, performance for engineering, and design has limited itself to set direction for the production and program the performance. I also worked more on considering how construction and installation could be done regarding the function of the house, rather than in the production point of view. My experience in a household electrical appliance company helped in making precise blueprints of the field. My son and I armed ourselves with goggles and dust mask to take apart the old ceiling and take a look into it. We took detailed measurements to make a new ceiling. However, each corner, which seemed to be in apple-pie order with perfect quadrangles, all came up with different numbers. The materials were also in various conditions. The fickle characteristic of the field, blunt tools for general use, inaccurate materials, and my lack of experience eventually resulted in poor practice in the overall process. The plans were improvised on the spot while all the sawing and nailing was done at the same time. After all was finished, I found myself being generously satisfied with the outcome. The rough and uneven finishing came to me as natural and comforting. This was a completely different experience from the usual world of precision that I was involved in, producing design with one tenth millimeters of accuracy. Personally being a part of such experience, not only having the idea of it, affected me greatly in my perspective on objects.
나에게 2016년은 여태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한, 아주 특별한 한 해라 할 수 있다. 시골에 거처를 마련하고 낡은 그 곳을 수리해서 ‘내가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시골집을 마련하게 된 이유는 물론 나중의 삶을 살아갈 터전을 마련하려는 투자였다. 사실 삶이란 것이 불확실함의 연속이고 우연으로 점철된 것이라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지금 결여된 것을 언제나 미래의 소망으로만 삼고 살 수는 없지 않을까? 나이 먹은 한국인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도 아파트 이전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집에 있던 큰 후박나무와 라일락, 개나리, 채송화까지 그 기억은 달콤했다. 때 되면 어머니는 땅에 독을 묻고 배추를 다듬어 김장을 하셨다. 개미는 언제나 줄지어 열심히 돌아다니고, 나는 생태 관찰인 양 땅을 파고 물을 부어 길을 막으면서 그놈들이 어떻게 제 길을 찾아 가는지 내려다보았다. 가을이 오면 아버지는 마루에 연탄난로를 놓고 풀을 쑤어 덧문에 한지를 견고히 붙였다. 다시 봄 햇살이 따스해질 때쯤 온 가족이 모여 창문을 다 떼어내고 물청소를 했다. 신문지를 구겨 신나게 유리를 닦으면 반짝반짝해지는 정말 뿌듯했던 어느 휴일이 기억난다. 그렇게 집과 관련된 많은 일들을 보면서 컸다. 그리고 지금 주변에선 그런 것들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라일락꽃이 핀, 마당이 있는 집이 숨 가쁜 일상으로부터 나를 구원하리라는 기대 때문일까? 우연히 발견한 장소는 멋진 곳이었다. 집은 왕래가 거의 없는 길옆에 있었다. 언젠가 친구가 들러 그 길을 보고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S’ 자가 두 번 겹친 꼬부랑길이 언덕배기로 올라가 주변 숲으로 둘러싸인 등성이 사이로 사라진다. 땅은 남쪽을 바라보고 앉아서 동쪽으로는 골짜기, 북쪽으로는 산그늘이 지는 곳이었다. 집도 슬라브 구조로 쓰러져가는 시골집과는 거리가 있어서 일단 잘 수 있어야 하는 내 수요에 안성맞춤이었다. 우선 백지가 가득 찬 클리어 파일을 준비하고 모눈종이 공책을 한 권 샀다. 집사람은 프로젝트 시작이라고 하였다. 무엇이든 실험해보자고 말한다. 고맙다. 그럼 무엇부터 그려야 할까? 땅의 경계가 어딘지 평면부터 대충 그려본다.
직업이 분화된 후 현대적 디자인의 개념은 실행이 아니라 계획이라고 한다. 생산은 공장에, 성능 실현은 엔지니어링에 맡기고 디자인은 생산과 성능을 고려한 방향 설정, 계획 수립으로 스스로의 임무를 규정했다. 그래서 나도 도면으로 계획부터 시작하였다. 정밀도를 중시하는 가전회사를 10년 가까이 다닌 덕에 밀리미터 단위로 생각하고 도면을 그리는 것에는 익숙했다. 그래도 배운 것이 도움 되는구나 생각하며 구조를 종이에 옮겼다. 레이저수평계 같은 신무기와 콤푸레샤와 에어타가에 방진복과 고글, 마스크로 완전 무장을 하고선 아들과 오래된 천정을 뜯어내고 내부를 살피며 치수를 쟀다. 하지만 네모반듯해 보이던 천정 치수는 모두 제각각이었다. 현장은 도면 속의 아이디얼한 세계가 아니라 수없는 디테일을 가진 변화무쌍한 것이었다. 어디는 무르고 어디는 딱딱하며, 튀어나오고 들어간 것이 춤추었다. 면은 고르지 않았고, 선은 직선이 아니었다. 결국 매번 치수를 재면서 목재를 맞춤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만들었던 도면의 치수는 그저 재료 구매 수량을 대충 계산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뿐이었다.
천정도 그랬지만 재료도 제각각이었다. 보통 한치 길이라고 한치각이라 부르는 목재의 단면이 몇 미리냐는 물음에 판매상은 말끝을 흐렸다. 목재 길이가 3600미리라고 하여도 실제로 재보면 수십 미리 더 길었다. 목재 한단 12개를 사면 1~2개는 휘어있었다. 더구나 작업이 서투르고 힘이 달려 애써 잡은 직선이 비뚤어지고 직각은 벌어지는 일이 언제나 발생했다. 현장의 변화무쌍함과 범용 도구의 무딤, 공급되는 재료의 부정확함, 작업자인 나의 부족함은 결국 계획과는 달리 전체적인 부실을 불러왔다. 결국 원래 계획은 톱질을 하고 못을 박으며 도면에 반영될 틈도 없이 즉석에서 수정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에 한없이 너그러워진 내 자신을 발견하였다. 왜뚤비뚤, 울퉁불퉁한 자체를 자연스럽다고 자위하였다. 그동안 내가 다뤄왔던 1/10미리 정도의 정밀도를 가진 세계와는 정말 다른 세계였다. 그 차이를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내 ‘몸’으로 겪어보니 그것은 정말 달랐다.
아름다운 전원이라고 나를 위협하는 것이 없을 수 없다. 내부와 외부가 정의되고 경계가 형성되어야 나는 내부에서 안전할 수 있다. 그래서 집짓기는 경계 짓기 작업이다. 지난 수개월 동안 내가 경험한 외부의 위협은 다양했다. 우선 한기가 있다. 더위는 참을 수 있지만 추위는 생존에 직접 영향을 준다. 영하 10도를 쉽게 넘어서는 겨울 추위와 싸울 준비에 가장 많은 시간을 들였다. 천정과 외부에 면한 내부 벽체를 단열재로 보강하고 난방배관을 새로 연결했다. 난방배관은 업자가 손을 봐주었으나 벽체는 사정상 대부분 혼자만의 작업이었다. 바로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 있는 인터넷 선배님들은 언제나 든든한 후원자였다. 적절한 접착제를 찾고 그것이 마르기 전에 붙이고 고정시킬 수 있도록 공정을 짜야했다. 모든 것은 내가 가진 도구와 기술로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결정되었다. 기름도 한 드럼 채웠다. 하지만 여전히 바람이 새는 곳이 있고, 난로도 아직 들이지 못했다. 아직은 본격적인 추위가 오지 않아 시간이 있다. 한 겨울에 들어서 치열한 전투를 벌일지, 진지를 버리고 일단 피신부터 해야 할지는 동장군이 도착할 때쯤 알게 될 것 같다.
추위를 벽으로 차단하고 문풍지로 틀어막지만 그래도 어디든 구멍은 있다. 그 구멍으로 벌레가 들어오고 사람들은 벌레를 싫어한다.1 집 내부를 공사하는 도중에는 웬만큼 돌아다녀도 신경 쓰지 않으려했다. 하지만 와중에 된통 벌에 쏘이고 나서는 차츰 가차 없이 응징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았다. 이전에는 가급적 벌레를 죽이지 않으려 애썼던 나였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자 시골 생활 선배인 옆방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놈이 집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집에 들어간 것이죠.” 정말 그랬다. 낡은 그 집의 여기저기에는 이미 벌집이 있었다. 누가 먼저 자리를 잡은 것인지는 알기 어렵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가자지구가 떠오른다. 누가 먼저 그 땅에 들어온 것일까? 내가 벌들을 내쫓는 것은 이스라엘의 장벽과 무장 제압과 유사해보였다. 나는 약자인 팔레스타인을 심정적으로 지지하지만 벌들에게 약을 뿌리고 신문지를 휘두른다. 수년 전 디자인방법론 수업에서 야생동물과 인간의 공존을 공부한 지영이가 내린 결론은 두 가지 다른 세계의 공존이란 적절한 경계를 긋고 서로를 침범하지 않는 것이었다. 함께 거니는 공존이란 멋지지만 실제가 되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둘이는 서로 너무 너무 다르니까2.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있다. 추위나 벌레는 내 생각은 신경도 쓰지 않지만 사람들은 나와 소통한다. 내가 도움을 얻고 또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서로 기대어 사는 것이 사람의 특징이다. 담이 없고 사방이 모두 길에 붙은 우리 집은 지나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다. ‘세멘 사왔구나’, ‘아직도 저것밖에 안 되었네’, ‘이제 사람은 사나’, ‘어 수돗가 만들었네!’ 같은 말들을 하실 것 같다. 몇 호 안 되는 시골길에 그래도 매일 조금씩 심심치 않게 이야깃거리를 제공하는 우리 집이 그런대로 괜찮은 역할을 하고 있겠지 하고 생각한다. 오가면서 인사하고 강아지도 만져주고, 지금은 파씨를 털어내야 한다는 말씀도 듣는다. 김치도 얻어먹고 대추도 나눠드렸다. 난생처음 강아지 예방주사도 찔러보고, 눈이 침침한 할아버지 대신 시외버스 시간도 알아본다. 그런 관심과 소통이 그동안 도시에서만 살던 나에겐 모두 낯선 것이지만 마음 편하고 작은 일임에도 뿌듯하기도 하였다. 지금도 그렇게 경계 없이 주변 사람들과 즐거이 지낸다.
하지만 때로 사람 사이의 규칙을 어기고 다른 사람을 수확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나는 그 분들을 경계하면서 창문을 닫고 문을 잠그며 못을 친다. 처음에는 그저 소설 속 이야기, 기사 속 어떤 사례에 불과했던 그런 상황이 어느 날 조금씩 더 현실이 되었다. 뭔가 없어지고 창고 문 나사가 풀리면서 누군가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둠이 내리면 미지의 불안한 외계가 바로 처마 밑까지 밀려들어오고 경계를 확인하느라 문고리를 다시 만져본다. 집은 그런 나를 지켜줄 기본적인 방어막이다. 담이 허술하고 경계가 불확실한 시골집 마당은 사실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다. 담을 치면 오히려 길 너머 저편 산자락까지 내다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니 내 손해다. 결국 내가 열면 동네가 다 우리 마당이 되어버린다. 대신 남도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조금 없어지는 것은 그리 심각한 일이 아니다. 가져다 쓰고 돌려놓기도 하므로 ‘시골이니까’라는 생각으로 봐주기도 하는 것이다. 대신 잠긴 문은 경고라고 할 수 있다. 이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심리적 경계선이다. 잠긴 문을 뜯는 것이 어렵지는 않지만 그것을 뜯으면 봐줄 수 있는 선을 넘는 것이라는 공감대가 있다.
사람은 도구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한기나 물, 벌레나 식물과는 다른 위협이다. 드라이버를 사용하면 문고리를 고정한 나사쯤은 아주 쉽게 풀 수 있기 때문에 문고리를 달 때 드라이버 팁이 나사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첩을 접어서 나사를 가리는 것은 상식이다. 경첩의 핀을 위로 뽑아내는 도둑질 방법에 대응하여 신제품 경첩은 아래에도 걸림턱이 있다. 적외선 경보기는 좌우 110도로 다가오는 물체를 발견해서 무지막지한 경보를 울린다. 요즘 CCTV는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실시간으로 가족들 휴대폰에 영상을 보내주고 필요하면 촬영하거나 경고음을 내는 원격조정이 가능하다. CCTV 못지않게 ‘CCTV 촬영 중’ 팻말은 사람에게만 소용되는 아주 효과적인 방범 메시지다. 그래서 그 팻말만 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도 나는 이번 주말 진짜 CCTV를 달아놓을 것이다. 가장 진화한 위협은 그에 맞는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
집은 나와 바깥을 구분 짓는 경계다. 삶은 허약하기 짝이 없고 누구든, 심지어 달팽이도 집이 필요하다. 화가인 친구가 오래 전 그린 그림이 내 방에 있다. 제목은 서식지.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넉넉하지 않았던 그 친구의 신혼집은 차고였다. 한쪽 구석에 세멘으로 만든 실내 수돗가가 있었다. 그 지하실은 두 사람의 사랑을 외부로부터 지켜줄 곳이었다. 의식주 어느 것 하나 부족하면 곤란하겠지만 그중에 주(住)가 ‘살 주’라는 것이 새삼스럽다. ‘그저 집이지 뭐~’라고 무심코 생각하고 지나가던 것이 ‘집은 삶을 지켜주는 경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계획하고 수리한 집은 보잘 것 없다. 사실 제대로 된 직선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내 자신의 한계 속에서 직접 하나씩 만들어낸 모양이 좀 못나면 어떠랴? 난 그 속에서 잠이 들고 바람과 곤충과 다른 사람은 바깥에 있다. 이상적인 형태는 신전과 같을 뿐 인간의 집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동안 우리는 신전을 앞마당에 짓고 그 속에 살려고 애썼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집의 내외부를 가르는 경계를 치면서 직접 내 몸을 써서 만들어진 형태를 통해 배웠다. 삶과 유리되어 쓸모없는 디자인이 못난 것이다. 그래서 충분한 경계를 만들어내는 집은 아름다울 자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