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mony between the Individual and Society in the 21st Century
The history of humanity has generally been progressive despite occasional setbacks. The dramatic increase in the global population in the 19th and 20th centuries is evidence of this progress. It is commonly assumed today that economic growth is the key to solving every problem, but such growth has suddenly halted and no one has been untouched by its devastation. Societies that have only emphasized growth have not done enough to establish systems to protect the most vulnerable members of society if growth slows. Moreover, decreasing appreciation of democratic ideals has resulted in a greater disregard for the sanctity of individual lives and the value of labor has plummeted. Today, the older generation abuses and exploits the younger generation which cannot understand its own value. Since time immemorial, every generation has lamented the rebelliousness and impudence of youth, but at some point, those impertinent and defiant youth suddenly disappeared. Youth consciousness has suffocated in the midst of an unemployment crisis. Suicide is the leading cause of death among young people, even outstripping diseases and accidents. Suicide accounts for an average of 12% of deaths in OECD countries, but it is approximately 20% in Japan and 30% in South Korea. The rate of poverty among the elderly in South Korea is 48%, far greater than the 20% of Japan and Mexico, the countries with the next-highest elderly poverty rates.
개인이 좋은 고교, 좋은 대학, 좋은 기업, 좋은 인생을 꿈꾸며 자기계발을 총동원해 적극 투쟁하는 가운데, 사회는 체계적인 과열 경쟁, 빈틈없는 세금과 임대료, 시의적절한 보이스피싱과 사기와 폭력 스펙트럼으로 이에 보답한다. 개인 차원에서 모든 것이 편해지고, 빨라졌다. 또한 저렴해졌다. 기호품, 가전제품과 내구소비재는 개인의 소득수준에 비교해 대부분 80~90년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싸다. TV, 노트북, 휴대전화의 컬러풀한 픽셀이 보여주듯 삶 자체는 훨씬, 그리고 충분히 윤택해졌다. 사회는 자연까지 동원해 보답한다. 4대강, 세월호, 마리나리조트, 이명박근혜최순실게이트, 트럼프, 김정은, 아베, 시아저씨, 원전사고(일본), 황사, 미세먼지, 환경오염, 지구온난화, 유례없는 폭염.
인류 역사 전반을 볼 때, 때론 후퇴를 했지만, 전반적으로 진보하고 성장했다. 19~20세기 전 세계 인구의 급격한 증가가 그 증거다. 그런데 경제성장만 하면 어떻게든 된다는 생각에 계속 달려왔는데 돌연 경제성장이 멈췄다. 모두 망연자실한 상태다. 성장만 강조한 사회는 막상 성장이 멈칫거릴 때 개인이 보호될 수 있는 장치마련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평가절하된 결과 개인의 삶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노동의 가치는 땅에 떨어졌다. 기성세대는 자기 존재를 추론해내지 못하는 젊은 세대를 악용할 뿐이다. 젊은이들은 늘 반항적이고 되바라졌다고 모든 연령층이 개탄했지만, 어느 순간 그 발칙하고 반항적인 젊은이들이 갑자기 사라졌다. 취업난 속에서 젊은이들의 의식은 질식했다. 자살이 젊은이들의 제 1사망원인이다. 단지 이 시대에 태어났단 이유로 질병이나 사고가 아닌, 자살로 목숨을 포기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사망원인 중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12%일 때 일본은 20%, 한국은 30% 내외다. 한국 노인 빈곤율은 48%, 상위권인 일본, 멕시코의 20%를 압도한다.
미국은 백인이 기득권의 대부분을 차지한 가운데 흑인과 소수민족들이 얼마 남지 않은 몫을 두고 갈등하며 노출되는 사회불안 상황과 이슈를 사회 유지용 역동성으로 활용한다. 백인종이 약을 팔고 황인종은 술을 팔고 흑인종이 이를 사주고, 황인종이 모으면 흑인종이 분탕질하고 백인종이 벌금을 매긴다. ‘희망적인 미래’를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행복’이 가능하다. 이루어지지 않을 목표에 굳이 매달릴 필요가 없다. 미래의 출구가 불투명하니 ‘자기만족’이라도 하자(사토리 세대: 일본, 달관 세대: 한국). 바로 옆 나라 일본과 비교해 우리 사회는 사회적 격차가 훨씬 커서 연대의식이나 동질감에 기초한 행복감이 존재하기는커녕 격차의식에 따른 박탈감과 갈등이 사회문제의 기반을 이룬다. 그간 한국의 징병제는 아이에서 어른으로 나아가는 일종의 통과의례로 암암리의 기능을 수행해왔다. 징병제가 특별히 필요할 것 같지 않은 많은 선진국이 이를 유지하는 이유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에 노정된 병영 내 비열한 따돌림과 잔인한 폭력은 이런 최소한의 기능마저도 와해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는 개인의 능력이 최우선이란 말을 입에 달고 다니지만, 실상 자본주의 현실 공간이 행사하는 물리력으로써 임대료(주거비)가 자본소득과 금융소득과 함께 큰 몸통이다. 화이트칼라, 블루칼라를 막론하고 모든 월급쟁이와 자영업자가 여기에 가장 큰 비용을 치르도록 구조화한다. 임대료와 지대를 결정하는 임대사업자(지대소득자)는 국세청 이상으로 임금노동자의 지갑을 훤히 꿰고 있어 기회가 닿을 때마다 지불한계선을 최대치로 조정해둔다. 그러니 임차인은 월세, 전세 치르면 치를수록 협상력이 후퇴한다. 결국, 갱신과 이사를 거듭하다 한계에 이르면 산동네나 외곽으로 밀려난다. 늘어난 출퇴근거리만큼 차비를 더 쓰고, 길에 버린 시간은 늦게 자고 일찍 깨기 혹은 주말에 늘어지게 자기 등 개인 시간을 동원해 벌충한다. 만원 버스, 지옥철에서 시달림은 덤이다.
자영업이나 개인 서비스업도 같다. 때로 낮은 노동단가에서 이익을 남기기는 하지만 대부분 부가가치가 로열티와 임대료 같은 자본소득으로 빨려 나간다. 보고서는 수도권 집중화 심화와 지방과 격차에 따른 소득기회와 편의성 격차라고 건조하게 서술한다. 소득기회를 확보하고 문화향유와 같은 편의성에 접근하려면 수도권의 비싼 부동산 가격과 임대료 부담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 부동산과 임대료에서 빨아들여진 자본은 재투자되어 양적으로 팽창하고 그만큼 더 많은 자본소득을 올리고 그 자본으로 더 큰 자본소득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을 확장한다. 지적 능력과 손재간과 머슬 파워를 맥시멈으로 돌려 가까스로 얻은 돈을 딛고, 걷고, 앉고, 누울 공간과 시간에 지불하는 것이다. 피곤하게 일하는 임노동자에게 보상한다는 산업이 바로 서비스 산업이다. 어떤가? 서비스 산업의 최전선을 담당한 산업역군이 알바생들이다. 다이소부터 이마트까지 모든 고객은 표시된 정가대로 지불하지만 제대로 된 서비스는 드물다. 낮은 임금으로 시간을 때워가며 마지못해 일하는 그들은 계산대 앞에 선 이가 비슷한 업종의 고객이라도 어떤 유대감을 느끼진 않는다. 일터는 갈수록 삭막해지고, 고객은 어딜 가도 좋은 인상을 받질 못한다. 우리가 지옥을 만들고 우린 그 지옥을 개탄한다. 소득부문에서는 중저기술 분야의 수많은 생산영역이 사라졌다.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훈계만 남고 비판할 사람이 사라진 이 시대. 공동체, 연대 등의 단어는 완전 경쟁터가 되어버린 이 세계에 개인은 먼지처럼 흩어져 산다.
‘나는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 혹은 ‘절대 손해 볼 수 없다.’는 강고한 정신으로 서로가 서로를 조롱한다(일베). 한국 사회는 특정 문제를 사회 구조적 측면에서 이해하는 촉수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러 가치들이 놀라운 속도로 말살되고 있다. 비판적 논의를 제공하는 최후의 보루인 대학도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만들어주겠다면서 취업률에 따라 학문의 씨를 없애고 교육부 눈치 보며 내용은 없지만 이름만은 번듯한 커리큘럼을 만들고 뭘 가르칠지보다는 잘 가르친다는 알리바이 작성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 지루한 교육현장에 비해 인터넷 매체 공간은 훨씬 다채롭다. 거기 떠도는 멋진 경험담, 취재기: ‘성과주의에 집착 않고’, ‘세계를 여행하며 소규모 커뮤니티를 만들어 봉사하는 자유로운 젊은이들’… 그래서, ‘이런 개인이 모인 사회가 행복하다.’라는 추론(오찬호).
물리적 공간과 시간엔 별 지분이 없는 젊은이들에게 남은 공간이 사이버 공간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매지리와 생활관과 교실 사이를 묵묵히 걸어 다니던 학생들(연세대 원주캠퍼스)……. 이제 그런 학생은 없다. 하루에 몇 차례라도 독수리 택시를 탄다: ‘먹고 자는 곳(숙소)과 배움의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곳(교실), 사이를 최단시간에 연결하라(‘순간이동’ 독수리 택시의 임무).’ 캠퍼스를 제 집 앞마당처럼 여기고 고속도로처럼 질주하는 택시는 개별 운전사의 수입과 개별 승객의 편의성을 정점으로 존재하고 나머지 세계를 재앙 속에 남긴다. 독수리 택시가 이동하는 그사이 공간은 현실 세계지만 비현실세계다. 승객과 운전사의 의식 속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가끔 눈에 띄는 공간은 카페인을 섭취하며 나와 비슷한 누군가와 노닥거릴 카페 정도다. 그리고 두세 차례의 밥은 오토바이가 가져온다(통화가 밥으로 변한다). 숙소와 교실과 카페와 식당? 이들이라고 현실 공간으로 존재할까? 많은 경우 랩탑과 스마트폰 밖으로 밀려나 비현실 공간으로 바뀐다. 게임과 기묘한 동영상과 SNS 속에 사는 우리 의식, 몸은 숙소에 있지만, 의식은 숙소에 있지 않고, 몸은 교실에 있지만, 생각은 교실에 있지 않다. 비현실이 현실을 대체한 세계. 우리 세계는 이미 매트릭스다.
2018년 9월
참고서적: 후루이치 노리토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민음사,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