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s Koreans have been identified as consumption itself, carrying out the latest trend of “luxury” consumption in “In Seoul.” In other words, it has become a consumer robot called the Korean people. As Gio Ponti once said, half of the world is created by God and the other half by designers, experts on design fields in Korea, which has become a consumption robot, are driving Korea into a more radically uninformed, homogeneous world. This is because their current “user-centered” are also referred to as “Koreans” who are homogenized into consumption robots. Moreover, the environment in which they see and perceive is also bound to be a simple, plaid, “in Seoul” artificial environment. Thus the new buzzword “philic environment” that has recently emerged among those homogenized people cannot escape from being anti-natural, anti-human-social and anti-environmental circumstances. As if the images proudly displayed by the LG Signature consumer electronics ads are reminiscent of those of the extremely uniform and devastated consumer environment criticized by Super Studio and Archizoom Associati. After all, the only way out is to get as far away as possible from “In Seoul,” which is uninformed into simple grids, and has less impact on it. Also, only those who refuse to be robotized and constantly escape from the “luxury” consumption of “In Seoul” will be able to seek human nature as natural people and build a humanistic social environment as they begin to heal their ruined ecological environment.
우리 누구나 들어본 말,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이 말은 (주변) 환경이 인간의 성장 과정에 얼마나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지 잘 설명해준다. 즉,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동물이라는 사실에 대한 한 측면을 알려주는 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적 환경에 지배받는 동물로서의 인간 본성을 밝혀주고 있다. 인간은 자연에서 무리를 지어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이기에, 자연 속에서 그리고 무리를 지어 만들어지는 사회 및 그 사회적 인공물(생산물)들 속에서, 자연과 사회 및 그 인공물들과 상호작용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갈수록 인간이 동물이라는, 정확히는 암수딴몸으로 무리를 지어 살아가는 동물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거나 망각해가고 있다. 서구 “합리적 이성”으로 설명되는 (자본)”도구적 합리성”이 전 세계적인 지배를 공고히 하면서, 과거의 종교 신앙을 대체하였다. 그에 따라 현대인들은 (자본)”도구적 합리성”에 대한 굳건한 믿음 속에서 인간 자연의 동물적 본성을 부정하고 있다.
미국화된 현대 도시, 주거 환경
미국으로 망명하여 뉴욕에 정착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뉴욕과 같은 대도시에서 온갖 강력범죄가 끊이지 않는 문제들의 원인을 설명하는 각가지 사변적 통계 조사 연구의 무의미함을 토로했다. 왜냐하면 인간 동물의 본성에 따라 대도시의 인구 과밀로 인해 나타난 귀결이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미쳐를리히(Alexander Mitscherlich)는 “도구적 합리성”만을 따르는 미국화된 대도시의 문제로서 극도로 획일화된 단순함, 극도로 단절된 익명성의 지배 결과로 나타나는 범죄의 만연과 개개인에 행해지는 폭력, 무분별한 자연환경의 파괴 등을 꼽았다. 미국으로 망명하여 뉴욕에 정착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뉴욕과 같은 대도시에서 온갖 강력범죄가 끊이지 않는 문제들의 원인을 설명하는 각가지 사변적 통계 조사 연구의 무의미함을 토로했다. 왜냐하면 인간 동물의 본성에 따라 대도시의 인구 과밀로 인해 나타난 귀결이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미쳐를리히(Alexander Mitscherlich)는 “도구적 합리성”만을 따르는 미국화된 대도시의 문제로서 극도로 획일화된 단순함, 극도로 단절된 익명성의 지배 결과로 나타나는 범죄의 만연과 개개인에 행해지는 폭력, 무분별한 자연환경의 파괴 등을 꼽았다. 그는 높은 인구밀도로 인해 자본 경제성 만에 따라 천편일률적으로 건설된 도시에서 가정의 안전한 보호와 다양한 생리 욕구의 충족 및 양육과 성장 등의 도시주거환경이 갖는 본질적인 기능들이 무시되고, 익명화된 개인들은 오직 동물적 생존 욕구에만 집착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정신의학적 측면에서 보면, 인간은 환경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이기에, 도시 환경이 인간에게 행하는 그대로 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즉, 단순 격자망으로 획일화된 도시의 반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들은 주거 만을 갈구하는 추상적 개체로 전락하고, 인간 정신에 대한 지속적 폭압에 따른 정신 분열과 폭력성 증가를 낳는다는 것이다. 르페브르(Henri Lefèbre)는 이런 도시에서의 계량적으로 획일화된 주거공간을 “주거 기계”라 특징짓고, 그 속에서 개인의 생활과 삶이 동질적으로 결정된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기계)로봇화된 개인들 스스로는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로 여긴다고 설명했다.
서구 소비사회의 도시, 주거 환경 비판 디자인 운동
서양의 미술가들 역시 미국화된 현대 도시와 주거 환경의 문제들을 직시하고 작업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들을 모색했다. 그 중, 1966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결성된 그룹 슈퍼스튜디오(Gruppo Super studio)와 아르키줌 아소시아티(Archizoom Associati)는 작업을 통해 미국화된 현대 도시와 주거 환경의 문제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면서 강도 높게 비판했다. 서독의 소도시 울름에 세워졌던 울름조형대학(Hochschule für Gestaltung Ulm, 1955~68)에서도 알렉산더 미쳐를리히가 밝힌 바와 같은 문제들을 직시하고, 그러한 인공환경의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신생 전공 분야인 제품디자인(Produktgestaltung)과 시각소통(Visuelle Kommunikation)의 목표를 환경디자인(Umweltgestaltung)으로 정립했다. 그러나 환경 문제들의 근원인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 체제와 대립하면서, 결국 폐교되었다. 그런데도 울름조형대학의 환경디자인 이상은 1970년대 독일어권 산업생산 현장에 폭넓게 전파되어, ‘노동환경의 인본화’, ‘사회적(사회 약자를 위한) 디자인’, ‘생태환경 디자인’ 등의 운동들이 펼쳐졌다. 비록, 1980년대부터 휘몰아친 ‘세계화’로 무참히 짓밟혀 버렸지만 말이다.
한국의 서구화된 현대 도시, 주거 환경
서울과 대도시를 중심으로, 무분별한 개발과 함께 급속히 전개된 “조국 근대화”는 한국의 도시와 주거 환경을 극도로 획일화된 단순격자 구조로 바꿔 놓았다. 그 결과, 한국인들의 고유한 유대관계를 이끌던 공동체가 파괴되고, 사람들은 극도로 단절된 익명의 개체로서 동물적 단순 욕구충족만을 추구하는 소비자로 동질화되었다. 이처럼 한국의 대도시에서 익명화되고 동질화된 개인들의 민낯은 정연두의 『상록타워』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가 보여준 서울의 한 아파트 상록타워의 공간과 아네테 메릴트(Annette Merrild)의 『룸 프로젝트』에서 보여준 공간을 비교해보면, 한국인의 주거환경이 서구의 그 어느 도시보다 얼마나 획일적으로 익명화되었는지 잘 드러난다. 그런데도 한국인들은 거침없이 계속 기존의 주거환경을 가차 없이 파괴하고, 경쟁적으로 획일화된 아파트에 들어가 동일화되기를 희망한다. 거기서는 지위 서열을 상징하는 아파트 브랜드와 동일화되려는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경쟁만이 펼쳐질 뿐이다. 올리버 그림(Oliver Griem)은 이러한 기현상을 『로열 블루 부동산』 설치를 통해 풍자했다. 한국에서는 이제 도시와 건축물 및 주택까지 모든 인공물이 지위 서열을 상징하는 획일적 소비품이 되었고, 이러한 인공물 환경 속에서 한국인들은 인공물 소비행태 그대로 변화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의 『나는 쇼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I shop therefore I am)』에서 보여준 것처럼, 한국인들은 오직 소비품의 소비를 통해서만 자신의 정체성과 사회적 지위 서열을 갖는 존재로 전락했다. 그리고 시시각각 변하는 최신 유행의 획일적 소비를 통해, 자신이 꿈꾸는 지위 서열과 동일화된 자족감을 얻고 그에 위안을 받는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스스로 낙오자가 된 것 같은 좌절감과 패배감에 쌓인다. 이러한 최신 유행의 획일적 소비 현상을 이미혜는 『국민 취향』에서 잘 드러내 보여줬다. 무엇보다 『국민 취향』에서는 르페브르가 밝힌 것처럼, 한국 국민이라는 동질적으로 로봇화된 개인들이 스스로 획일화된 동일한 소비를 하면서도 그 소비를 통해 자신이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로 인식한다는 사실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이처럼 동질의 ‘국민’으로 획일화된 한국인들은 ‘남과 다름’에 대한 무의식적 공포 속에서, 남과 같은 최신 유행의 소비가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한국을 방문한 한 외국인이 강남 거리에는 똑같이 화장한 마스크를 쓰고, 똑같이 차려입은 사람들만 다닌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인서울
이제 “인서울”은 한국 사회에서 서열의 최상위로 군림한다. 한국에는 서울과 그 주변 위성도시들로 이루어진 수도권만이 존재한다. 한국인은 낙오자, 패배자가 되지 않고자 사력을 다해 서울로 진입을 꾀한다. 서울로 들어갈 수 없으면 주변 위성도시에라도 머물려고 안간힘을 쓴다. 또한 만물이 상품화된 현실 속에서 한국인들은 서울 중심의 최신 유행의 소비에 매진한다. 대학이 TV와 인터넷 매체에 광고하고, 대학 및 대학원 입시 박람회를 개최하는 작금의 현상이 말해주듯, 대학도 “명품”을 외치는 소비품으로 전락했다. 그 결과, 한국인은 “인서울”의 대학을 “명품”으로 여기며, “명품” 대학 소비를 향해 사투를 벌이기 시작한 지 오래다. 발레리 줄레조(Valerie Gelezeau)라는 지리학자가 대규모의 단순 격자화 된 획일적 아파트 군집으로 이루어진 서울을 보고 『아파트 공화국』이란 사회문화과학 연구를 하게 만들 만큼, 서울의 충격적인 환경과 모습이 “인서울”에 매몰된 한국인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최신 유행의 소비에서 어떤 용도의 기능인가, 소비자의 환경과 취향에 어울리는가 등의 본질적인 물음들이 한국인에게 우문이 되었듯이, 소비품으로서의 대학 또한 전공학과들이 어떤 특성을 갖고 그곳에서의 학습이 어떤 기본 소양과 자질이 필요하고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들은 잊힌 지 오래다. 오늘날의 한국인은 “인서울” 속에서 최신 유행의 “명품” 소비를 행하면서, 그런 소비를 위한 존재로 동일화되었다. 다시 말해서, 한국의 국민이라는 동질적인 소비 로봇이 되었다. 그래서 세상의 반은 신이 창조하고 그 나머지 반은 디자이너가 만든다는 지오 퐁티(Gio Ponti)의 말처럼, 소비 로봇화된 한국의 디자인 관련 전문가들은 한국을 더욱 극단적으로 획일화된 동질적인 세상으로 몰아넣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내세우는 “사용자 중심”의 사용자 또한 소비 로봇으로 동질화된 ‘한국 국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이 보고 인식하는 환경, 그들이 추구하는 환경은 단순 격자화 된 획일적 “인서울” 인공환경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들 사이에서 최근 등장한 신종 유행어 “필환경”은 반 자연적인, 반인간-사회적인, 반환경적인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마치 LG 시그니처 가전제품 광고들에서 자랑스럽게 드러내 보인 이미지들이 슈퍼스튜디오와 아르키줌 아소시아티가 비판한, 극단적으로 획일화되고 황폐해진 소비 환경의 이미지들을 그대로 연상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단순격자로 획일화된, 계량적 서열로 동일화된 “인서울”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그 영향이 덜 미치는 곳이 유일한 탈출구일 것이다. 또한 “인서울”의 “명품” 소비로 로봇화되는 것을 거부하고 부단히 탈출을 꾀하는 사람들만이 자연인으로서의 인간 본성을 찾고, 자연 속에서 폐허가 된 생태환경의 치유를 시작하면서 인본적인 사회환경 건설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