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ole of Survival Design and Environment
Do pedantic design if that is what you need. But if it has nothing to do with your survival, leave it. If any theory that broadened your intellectual sights, yet now limiting yourself from doings, leave it as well. Survival design can be a desperate version of environmental design. ‘Indiscriminate royalty’ on ecological conservation can easily end up with deceiving the public for commercial advantages. Instead, you should do what is necessary in terms of ecological perspective. Maybe we should re-design the ‘action’ of design. Unlike sustainable design, which has a decent name but has ambiguous meaning, I like survival design because it can even include the dark side of the culture; like dirty rumors from a red-light district. Whatever method you’re using now, if you think that object that you are designing would help our ecosystem to survive, “do it!”.
어린 시절 수영을 배웠다. 동네 개울에서 하는 수영이 아니라 그래도 레인이 있는 정식 수영장이었다. 길이는 불과 십수 미터고 출발선에 공간이 없어 보호 철망을 한 손으로 붙들고 몸을 비틀어서 난간에 섰다가 출발해야 하는 곳이었지만 어린 나에게는 깊은 물이었다. 한 번은 수영대회에 참가해 당시 국제규격이었던 서울운동장 수영장 레인을 달려보기도 하였다. 왜 수영을 하게 되었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기회가 되어 수영을 할 수 있었고 물에 들어가면 빠져 죽지는 않겠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다. 방법은 ‘물? 괜찮아!’하면서 힘을 뺀 채 오래 떠 있기였다. 나름 수영대회도 나가고 수영을 배웠다고는 해도 그리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기억은 없다. 그저 아이들과 숨 오래 참기 내기하던 새우등 뜨기, 수영장 바닥에 붙은 채 가자미처럼 움직여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갑자기 솟구쳐 친구들을 놀래주는 장난이 주된 일이었다. 그러니 물과 친해지고 물이 그리 두렵지 않았다. 물이 두렵지 않으니 빠져 죽지는 않겠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한국은 스포츠에 대한 국가적 관심을 키웠던 나라다. 국가는 국가대표를 지정하고 태릉선수촌을 세워 선수들을 ‘체계적으로’ 지도했다. 그 결과 그리 많지 않은 인구수에도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종목이 몇 개는 데는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지난 시대에 비해 메달 수에 관심이 떨어진 지금은 달라졌다. 여전히 사람들은 재미있어서, 건강을 지키기 위해 수영장에 가서 영법을 배우지만 스포츠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있다. 빠르게 헤엄치는 ‘영법 수영’이 아닌 초보자도 물에서 오래 버틸 수 있는 ‘생존 수영’이 그것이다. 사실 아가미가 없는 인간에게 물속은 죽음의 공간이다. 지구 표면의 71%가 넘는 영역이 물이니 인간이 물과 마주칠 수밖에 없지만, 우리가 물속에서 생각할 것은 빨리 가는 것이 아니라 실은 생존이다.
학원 공화국인 우리나라는 ‘생존 수영법’도 또 하나의 교육과정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누워 뜨기, 엎드려 뜨기, 누워 떠서 이동하기, 엎드려 떠서 이동하기 등을 배워야 한다. 하지만 내가 물에서 생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체계적 교육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냥 물과 친해진 것이지. 수영대회 결과가 꼴찌였다는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나는 빠르게 헤엄치지는 못했다. 정립된 방식으로 배우고, 기초를 잘 다져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말이겠지만 배움에는 몇 갈래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교육과정을 만드는 이론은 언제나 미완성이고 그래서 그런 학습은 허구를 많이 안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물속에 들어가 내 몸으로 배우는 학습은 다르다. 어떻게 해야 내가 뜨는지, 원하는 방향으로 어떻게 몸을 틀 수 있을지 알게 된다.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치는 디자인도 다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생존디자인을 생각한다.
생존디자인은 디자인의 현장에서 디자인을 경험함으로써 드러난다. 현장은 비루하고, 난장판이지만 생생하다. 디자인이 무슨 조건을 갖춰야 하는지,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지, 결국 디자인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그 과정을 겪으며 살아남은 디자인은 생존 조건에 최적화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게 진짜 디자인이다. 그래서 나는 살아남은 모든 디자인을 칭송하고 싶다. 그것이 형편없는 세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도 디자인은 그 세계에서 필요한 일을 한 것이다. 그런 일을 실행한 모든 디자이너께도 존경을 표한다. 그들은 최소한 생존이 무엇인지 안다.
이론은 현실을 설명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현실을 살펴보고 그 속에 숨은(숨어있다고 생각하는) 원리를 찾아내 현실 이해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매우 훌륭한 생각이다. 하지만 이론화되는 과정은, 즉 과학의 과정은 철학자 카를 포퍼가 말했듯 반론을 통해 진전되고 반론이 힘을 얻기 전까지만 그 이론을 인정한다. 다시 말해 이론은 ‘노력’이고 ‘진실’에 가까운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탐구의 대상이 어디가 끝인지도 모르고 그것이 변화하는 양상도 따라가야 하므로, 성실한 여럿이 끊임없이 반성하면서 공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냥 도그마일 뿐이다. 자기와 반대되는 생각에 대해 그럴 수도 있겠다는 겸손한 태도와 서로 이해 가능한 논의를 진전시킬 힘이 꼭 필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그렇게 해도 이론이 현실과 다르다는 점, 이론은 허구고 현실은 실재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디자인의 이론도 마찬가지다. 디자인이 아직 이론적으로 성숙하지 못했음은 ‘현실에 대한 설명력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많은 책이 나오지만, 부분적인 통찰이 여기저기 산개해 있을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연구자의 겸손한 태도는 더욱 필요하다. 도그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다. 그리고 현장이 필요하다. 최근 거론되는 ‘최소존속제품(MVP, Minimum Viable Product)’ 개념은 현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출시 전 현장을 예측해 제품에 반영하려는 시도보다 곧장 현장으로 투입해 바꿔나가는 것이 더 생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디자이너나 개발자의 사전 조사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현장의 묵직한 진실과 디테일을 당할 수 없다는 통찰이다.
디자인이론의 한 축을 차지하는 ‘좋은(Good)’, 올바른(Right)’도 그렇다. 혹자는 A가 좋은 디자인이다, B가 옳다고 말한다. 좋은 가치, 올바른 가치란 과연 무엇일까? 가치는 어디서 만들어진 것일까? 가치는 문화라는 토양에서 서로가 합의한 기준이다. 때로 가치가 생성의 근원을 잊은 채 현실을 넘어서 도그마가 되고 그것이 억압으로 등장하는 상황을 우리는 역사에서도 보았고, 현재도 보고 있다. 옳고 그름에 대한 개인의 판단을 과도한 방법으로 남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디자인처럼 세부적 맥락에 기반을 둔 가치 지향 활동은 옳고 그른 것으로 판단할 수 없다. 다양한 가치를 품을 수밖에 없음으로 그것이 좋고 옳음은 디자인이론가 나이절 크로스가 지적했듯 ‘적절함(appropriateness)’으로 귀결된다. 인문학은 ‘정의(justice)’를 추구하지만, 디자인은 ‘적절함’이 기준이다.
생존디자인의 관점에서 좋은 디자인이란 생존하고 있는 디자인이다. 생존의 조건은 무엇일까? 생태계에 적응했다는 의미다. 인간과 자연, 인공물이 얽혀진 이 생태계를 존속시키는 생명의 순환 고리 속에 포함된 한 조각으로 잘 들어맞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디자인을 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충족 조건을 파악하면 디자인이 가능하다. 생존디자인에서 그 조건을 열거하려면 디자인하려는 나를 포함한 대상을 둘러싼 생태계에 대한 이해가 높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생태계는 환경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 공간적 환경이 아닌 상호연계된 통합된 총체적 환경이다.
지금 내가 앉아있는 의자라면 나의 손과 몸, 내 몸속에 굳은 편안함, 나의 자세와 일어나고 앉는 과정, 책상과 책상 위 나의 작업, 서재와 바닥재가 연결되어 있다. 한편 이 의자를 구매한 시점으로 돌아가면 내가 그 브랜드를 찾아간 이유, 매장과 진열, 나의 선택 과정, 포장과 배달이 있고 거기서 다시 공장으로 가면 여러 사람의 작업과 유통, 그리고 더 멀리 가면 나무의 원산지였던 인도네시아의 어느 숲이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의도와 디자인, 의사결정도 있었을 것이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언제가 폐기될 나의 의자의 운명을 본다. 이미 화학적 처리가 심했던 탓에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도 썩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니면 불태워져 누군가의 물을 데우고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발생한 이산화탄소는 모두 모여 오존층을 파괴한다. 아마존의 나비가 날갯짓을 한 것처럼,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이것이 생태계이고 환경이다.
생태계를 구성하는 어떤 것은 내 의자의 생존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우리가 한계를 가진 존재라 모든 것을 고려할 수는 없으니 전체를 보되 그중 어떤 것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의자의 사용자인 나에 대한 색깔 맞춤이 구매와 사용을 중심으로 본 디자이너의 관점으로는 가장 중요해 보인다. 나의 몸에 맞고, 나의 취향에 맞고, 내가 쓸 수 있는 돈의 범위에 속하도록 생산 비용을 고려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모든 디자인이 이미 이것을 중시하고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다. 굳이 생존디자인이라 칭하지 않아도 말이다. 그런 면에서 생존디자인은 그리 거창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의 시야를 확장해서, 불필요한 도그마에 빠지지 말고, 현장에 근거해서 꼭 필요한 생존의 요소를 담자는 것이다.
현학적인 디자인이 필요하다면 하자. 하지만 그것이 생존과 무관하다면 버리자. 나의 시야를 넓혀줄 고마운 이론이 나의 행동을 옥죄고 있다면, 그것도 벗자. 생존디자인은 환경디자인의 더욱 처절한 버전이 될 수 있겠다. 생태적 보존에만 ‘무분별하게’ 치중해 대중을 기만하고 자신의 상업적 이득을 취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생태적 관점에서 필요한 일을 하자. 어쩌면 디자인이라는 행위를 새롭게 디자인해야 할지도 모른다. 점잖은 이름을 가진 지속 가능 디자인은 아직 함의가 불확실하지만, 생존디자인은 우리 문화의 지저분하고 어두운 뒷면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용어 같아 좋다. 유흥가의 찌라시까지도 말이다. 지금 사용하는 방법이 무엇이든 당신이, 디자인하는 사물이, 우리 생태계가 생존할 수 있을 것 같다면 ‘그렇게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