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apting to Changing Ecosystems
Social ecosystems are important to human survival and happiness in this world which segregates humans from the rest of nature. Life and death cross in natural ecosystems. Natural ecosystems are sustained by the circulation of various elements. The creation of an ecosystem indicates that a set of cycles has reached a steady state. The existence of ecosystems does not indicate that there is an equilibrium in which everything has stopped, but rather that there is a cycle of life. Circulation over time causes ecosystems to become balanced. Design processes must define the scope of the problems which they address. The limits of design projects must be recognized and frameworks for approaching problems must be developed. Although it is regrettable, design cannot solve every problem due to its ontological limits. Designers need humility both now and in the future. They must acknowledge that there are things that they do not know. Ironically, such acknowledgment is the beginning of learning.
사랑스런 아기가 탄생했다. 축복 속에 예쁜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고 모든 이들을 행복하게 했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보채는 아이는 엄마를 힘들게 한다. 모든 아이가 그렇다. 왜 그럴까? 말을 할 수 있게 되더라도 욕구와 감정의 상태가 격하다면 더 큰 소리를 낸다. 엄마가 꼭 안아주고 달래지만, 필요에 따라 아이가 울더라도 짐짓 모른 체 하는 경우도 있다. 독립성을 키워야 한다며 아예 다른 방에 재우는 부모도 있다. 좀 더 커서 완구점 앞에서 실랑이하는 부모와 자식을 목격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다. 아이는 원하는 것을 위해 여러 시도를 해보고 어떤 것이 허용되는지 확인한다. 때로는 과한 요구가 폭력이 되고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해지는 일도 있지만 혈연관계 속 수많은 밀당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 그렇게 형성된 허용치의 조합이 만든 경계선 위에서 아이와 부모는 평화를 얻는다. 아이와 부모의 각기 다른 생태계가 하나의 가정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아이는 자신의 생태계 속에서 공부와 놀이의 규칙을 만들고 친밀감과 자존감을 세우며 자신의 능력을 키운다. 가족은 상호 의존해서 행복과 안전의 가능성을 높이지만 물리적으로 분리된 개별적인 몸은 개별적인 생태계가 있어야 생존할 수 있다. 아기가 우는 것은 시행착오를 통해 자신의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시도다. 아기가 구축하려는 생태계는 생존에 필요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려는 것이다. 누가 자기편인지,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 사랑함에도 무엇을 하면 안되는지, 그래도 필요한 것이 있다면 나는 어떤 식으로 요구해야 하는지 등 타인과의 관계를 정립하려 한다. 아이는 그 안에서 다른 생태계 구성원들과 주고받으며 생명의 순환을 일으킨다. 이미 자연과 경계가 만들어진 인간 중심의 세계 속에서 사회 생태계는 생존과 행복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폐쇄계인 우리의 몸은 너무 절대적인 실존의 주체라서 객체들의 조합이라는 시선으로 보기 어렵지만 나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나의 생존을 위해 상호작용한다. 소화기로 들어온 음식은 분해되어 일부는 당장 움직이는데 필요한 에너지로 사용되고 다른 일부는 근육과 골격을 단단히, 하며 남는 것은 지방으로 저장된다. 이때 뇌는 좋고 나쁨을 분간하고, 손은 입으로 음식을 가져가며, 이빨은 분쇄시키고 잘라서 목구멍을 통해 이동시킨다. 골격은 소화에 중력을 이용할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아주며, 심장은 혈관을 통해 신속히 산소와 양분을 사방으로 보낸다. 그 와중에도 허파는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인 산소를 몸 속으로 집어넣고 있다. 이때 나의 여러 요소들에게 필요한 것은 책임감과 적절함, 균형이다. 모든 요소들은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해야 하며 그 균형이 깨지면 차츰 생명은 쇠한다. 생명이라면 대부분 비슷하게 흡수하고 형성하며 저장하고, 내부의 균형이 깨지면 소멸한다. 너무 묵묵히 책임을 다하고 있는 요소들 때문에 내 몸이 하나의 생태계라는 사실을 종종 잊곤 하지만 자신의 몸과 대화를 시도하고 어루만지는 것은 중요하다.
몸은 피부로 격리된 완전한 내부를 갖고 있지만 우리는 외부 없이 살아갈 수 없다. 영양분과 물, 산소는 모두 외부로부터 유입된 것이고 환경은 그것을 얻을 수 있는 원천이면서 우리가 적응해야 할 터전이다. 동물은 산소를 흡수하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며 식물은 이산화탄소를 통해 광합성을 하고 산소를 배출한다. 우리는 다른 생명체의 몸을 섭취해 영양분을 얻는다. 그래서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것이 자연 생태계다. 자연은 다양한 요소들의 순환으로 유지되며 우리는 자연의 일부다. 생태계가 만들어졌음은 그것이 자연스러운 상태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생태계는 모든 것이 멈춘 평형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순환을 전제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순환이 계속되면서 균형이 맞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대순환 원리인 죽음에 저항하려 한다. 모든 생명은 죽음에 저항하지만 인간의 저항 도구는 빠르고 막강하다. 과학기술의 엄청난 진보로 첨단을 추구하는 지난 반세기는 인류의 역사를 하루로 표현할 때 마지막 20초간이고 지구의 역사가 하루라면 1/100초도 되지 않는 시간에 불과하다고 한다. 다만 도구로 인한 변화의 결과를 잘 모르면서 도구를 휘두르는 것을 보면 인류의 책임감은 아이 수준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결국 방 안은 난장판이 된다. 아기의 부모라면 어질러진 방 안을 정리하고, 마찬가지로 자연도 깨진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서 제자리에 있지 않은 것들을 제자리로 돌린다. 그러나 아기를 위한 엄마의 의도와 달리 자연의 정리 작업은 인간적 가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아기는 스스로 빨리 성숙하고 현명해지는 수밖에는 없다. 전 지구적 시각이 그래서 필요해진다.
몸으로부터 시작해서 아이의 시선이 닿는 정도의 주변과 가족, 집단, 사회, 자원의 공급망, 네트워크 가상공간, 지구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생태계를 확장시킨 것은 인간의 도구다. 도구가 없다면 우리는 매우 좁은 영역만을 경험하고, 나머지를 몽상의 세계로 남겨둔 제한적 존재였을 것이다. 도구는 인공생태계를 만들고, 디자인은 도구를 만든다. 도구를 만드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아무리 작은, 예컨대 단일 재료와 단일 공정으로 된 단순한 기능의 단순한 형태를 가진 ‘지우개’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현실 세계와 맺는 관계를 고려하다 보면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우개는 종이 위에 흑연으로 긁은 흔적을 잘 지울 수 있어야겠지만 종이는 그대로 보전해야 한다. 재료의 부드러움이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너무 빨리 닳아버릴 경우는 바람직하지 않다. 규격화된 흑연의 종류도 다양하고 흑연 흔적의 면적도 다양하다. 꼬마의 손 크기나 잡는 방법도 그렇고, 필통 크기도 형태와 크기에 영향을 준다. 정체성에 민감할 때인 주인의 성별과 취향도 신경 쓰인다. 필통 재질에 따라서는 지우개 고무와 화학적 반응을 해서 들러붙기도 한다. 가게의 매대에 놓여있을 때 다른 지우개와 은근히 경쟁하게 되고, 생산되어 이동할 때 박스의 크기도 운송료 때문에 고민된다. 생산할 때 작업자가 해로운 화학물질로 고생하지 않을까, 고무를 채취하느라 수마트라의 자연환경을 너무 훼손하지 않을지를 고려해야 할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저런 고민을 모두 담아 생산자와 판매자의 가치를 시장에서 대변할 브랜드도 지우개 디자인의 고려 대상이다. 종이와 연필 대신 종이와 복사기, 종이와 프린터의 개념으로 바뀌던 기술의 전환 당시에는 지우개의 사용처 자체를 고민했어야 했다.
재료와 구조가 복합적이고 공정이 만만치 않으며 다른 도구나 디지털 네트워크와 연결되어야 하고 조작이 복잡하고 사용자에게 익숙하지 않다면 위의 상황들은 곱하기로 어려워진다. 거기에 기능이 생명이나 신체의 상해와 관계있다면 매우 심각하게 디자인에 임하게 될 것이다. 또한 어려운 상황은 정의되지 않은 문제(ill-defined problem)로 만들어진다. 디자인은 문제 풀이인데 문제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없다면 어떻게 그 문제를 풀 수 있겠는가? 대상의 복잡성은 이런 문제를 배가시킨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하는 시늉은 낼 수 있겠지만 제대로 고려하기는 힘들다. 디자이너 찰스 & 레이 임스 부부는 Powers of Ten에서 문제를 보는 프레임의 차이에 따라 문제의 차원이 달라짐을 보여주었다. 디자인이 다루는 문제의 범위가 정해질 필요가 있다. 스스로 디자인 프로젝트의 한계를 인식하고 문제에 접근하는 프레임을 결정짓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디자인이 처한 존재론적 한계이기도 하다.
과거의 디자이너들은 내외부의 클라이언트가 제시한 과업의 범위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리고 주어진 역할에 맞는 도구를 사용하였다. 주로 제시된 조건을 시각화시키는 역할이었고 평면이든 입체든, 그림이 방법이었다. 뭔가 구체화하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기능이고 도구였지만 이제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사물은 차츰 복잡해져 가는 자연과 인간과 인공물이 통합된 생태계 속에서 작동해야 한다. 초연결사회, 확장된 개발 상황에 대처하는 디자이너의 인식과 미래에 필요한 도구는 무엇일까? 먼저 디자인이 처한 생태계의 변화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대상이 놓일 생태계의 구조와 흐름을 포착하는 것이다.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디자인이 대처할 신도구의 특징을 두 가지 이야기할 수 있다. 첫째, 시야를 확대하여 대상에 대한 총체적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한다. 과거에 산업디자인, 시각디자인 등의 도구적 특징 중심의 영역 분류보다 사용되는 장면 중심의 세분된 전문성이 더욱 중시될 것이다. 그래서 호기심을 지속시키고 해당 영역을 경험하고 관련 지식을 체화시키면 되는데 좀 싱겁기는 하지만 읽고, 쓰고, 기억하고, 경험하고 실습하는 것, 즉 공부를 하는 일반적 방법과 다르지 않다. 둘째, 생태계 속 대상의 복잡성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방법을 그 대상에 맞게 확보해야 한다. 그동안 디자이너들이 만들었던 모든 모형, 시안이 디자인의 전통적인 검토용 시뮬레이션 방법이었다. 여기에 대상의 복잡성, 역동성, 상호작용성을 감안한 시뮬레이션이 가능하다면 도래하는 새로운 생태계에 적응할 수 있는 준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문제의 프레임을 정한다면 그 자체가 해결안의 제한적 효과를 인정하는 것이다. 새로이 실험될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더라도 생태계의 복잡성과 상호연계성, 시간성의 실타래를 모두 풀 수는 없을 것이다. 모호함과 불안정함은 계속 남고 인간은 그것이 없어지지 않아야 기계 대비 존속 가치를 주장할 수 있을게다. 지금도 그렇지만 생태계와 대상을 좀 더 잘 다룰 수 있게 되더라도 여전히 인간은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충분히 만들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것은 다가올 그때나 지금이나 겸손함이다. 잘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자.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 좀 더 알게 되는 출발점이다.